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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인생은 나그네 길 (6)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인생은 나그네 길 (6)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2002년 08월 12일 월요일 제0면
내가 탄 'A트레인'은 참 잘도 달렸다. 모던 재즈에 일가견이 있는 명확한 컬러의 악단, 그리고 이를 잘 수용한 가수와 무용수 등 3박자가 척척 맞아 돌아갔다. 불협화음을 조장하는 엇박자는 거의 없었다. 각자 서로의 영역을 배려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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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 출신이라 해서 나를 따돌리면 어쩌나. 그걸로 팀원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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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생각으로 나는 늘 노심초사했다. 그러면서 대학시절의 거만스런 패기는 점점 사라지고, 생활인으로서의 관용이 그 자리를 메워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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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던가. 계절이 네번 바뀌어 다시 봄이 찾아왔다. 벌써 데뷔 한 지 1년이 지난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4.19 혁명이 발생한 1960년 봄 무렵이다. 갑자기 나에게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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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준(최희준의 본명)씨.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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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공연을 마치고 짐을 챙기고 있는 데 악단장 최성용이 나에게 찾아와 귀띔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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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축하할 일이라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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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무대에 설 기회를 잡았어. 아직 모르고 있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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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한 '다른 무대'란 국도극장에서 열리는 '세계의 휴일'이라는 대형 쇼였다. 화양연예주식회사가 행사를 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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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사는 당시 미 8군 쇼에 출연하던 20~30여개의 각종 쇼단체를 거느리고 있었다. 사무실이 남영동 선린상고 근처 어딘가에 있었다. 가끔 그곳을 들를 때면, A트레인의 동료이자 무용수였던 한익평과 함께 근처 순대국집을 자주 찾곤 했다. 순대국을 엉터리 일본말로 바꿔 "'순다이고쿠' 먹으로 가자"며 킬킬대며 웃던 추억이 지금도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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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참 친하게 지낸다. 한씨는 아직도 싱싱한 '만년현역'이다. 요즘 소식이 궁금해 오랜만에 전화를 했더니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23일~9월 4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연출을 맡아 눈코뜰새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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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세계의 휴일'에 출연하게 된 것은 분명 천운(天運)이었다. 미 8군 쇼에서 날리던 가수들 가운데 '대표급 가수' 몇몇으로 내가 뽑힌 것이다. A트레인에서는 악단과 나, 한익평 등이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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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우리의 관객과 만나는 첫 무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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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듯 약간은 단조로웠던 미 8군 쇼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나는 뛸 듯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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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평아. 우리 한번 잘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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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무대에서 냇 킹 콜 스타일로 '스타더스트'와 '고엽' 두 곡을 불렀다. 특히 '스타더스트'는 초반 레시타디보(敍唱)가 근사해 당시 내가 즐겨 부르던 노래였다. 나는 멀리서 찍은 당시의 사진 한장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나비 넥타이에 흰색 정장, 게다가 흰색 구두. 멋진 내 젊은 날의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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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세계의 휴일' 공연에는 나중 유명 연예인이 된 사람들이 많이 출연했다. 가장 기억에 남은 인물은 코미디언 서영춘과 백금녀다. 두 사람은 콤비로 출연해 기발한 '말장난'과 별난 움직임으로 객석을 휘어잡았다. 여자 가수 현미, 스윙 재즈에 능했던 프랭키 손(작곡가 손목인 선생의 아들) 등이 지금도 기억 나는 연예인들이다. 악단 지휘는 일명 '베니 김'으로 불린 김영순과 최창권이 번갈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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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미 8군 쇼의 베스트 멤버였던 만큼 '세계의 휴일'의 성과는 대단했다. 극장은 만원 관객으로 발 디딜 틈 조차없었다. 열광은 부산 제일극장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쇼도 쇼였지만,무엇보다도 나는 내 존재가 대중들에게 알려진 사실이 기뻤다. 신의 가호였던가. 마침 그때 극장의 어느 곳에서 나를 눈여겨 본 한 사람이 있었으니,그 분이 바로 작곡가 손석우 선생이다. 쇼 이전 나는 동료 가수 김성옥의 소개로 이미 그와 만난 적은 있으나, 그 뿐이었다. 하지만 이 공연을 계기로 손선생과의 인연은 급물살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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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 히스테리가 이만 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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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가수 최희준'을 있게 한 시발점이 된 가요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의 성공 신화가 잉태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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