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파트에 별스런 행동의 노 할머니가 한분 계셨다. 지난 1년여를 매일 출·퇴근 시면 아파트 입구에 어김없이 나오신다. 그리고는 오는 차, 가는 차에 손을 높이 들며 꾸벅 큰절을 하신다. 대충 연세가 아흔쯤으로 보이는 할머니의 차림은 모자에서 옷 신발까지 흰색 일색으로 늘 해말쑥하시다. 처음엔 기행으로 여겼지만 매일 늘 같은 장소와 차림, 행동이시라 궁금증이 더해 갔다. 하루는 슬금 다가가 이유를 물으니 소이부답(笑以不答)이신다. 주변에 물어물어 들은 얘기로는 그냥 적선을 행하신다는 추측 뿐이지 도대체 할머니를 아는 이웃이 없다. 차림세로 보아 불자(佛者)나 보살이신 듯한 노 할머니는 살아생전의 마지막 부처님 보시(普施)를 그런 식으로 실천하셨나 싶다. 아마 다른 방법의 일일 일선행(一日一善行)은 노구로 기력이 다해서 어려우셨을 게다. 헌데 이 할머니가 달포 넘게 보이질 않는다.
 
지난 한여름 살인적 무더위에 혹시 변고라도 생기셨는지 불길한 생각마저 든다. 노 할머니의 큰 인사 대신 그 자리에 추석 몇일전부터 귀향인사의 현수막이 내걸렸다. “즐거운 명절 고향 잘 다녀 오십시오”라고 적혀 있는 플래카드는 추석이 지나고도 그냥 있다. 노 할머니의 정성과는 너무 비교가 돼 씁쓸했다. 근처 슈퍼나 백화점도 행태는 마찬가지다. 연례행사식의 이 겉치레는 대형매점일수록 더해서 시절 가리지 않고 오래 끈다. 혹여 그런 기원 덕에 올 추석 귀향 귀성 길이 결과적으로 별 큰 사고 없이 무사했을 수도 있지만 노 할머니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는 듯 싶다. 한쪽은 작지만 순수지극의 정감이 배어 있고 다른 쪽은 단순히 형식적이란 느낌이다. 흔한 말로 “아님 말구”(“아니면 말고”의 기호지역 방언)식이다.
 
요즘 우리 주변엔 이 말의 의미가 너무 만연되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다. 세태반영이 아닌가 한다. 이래저래 헷갈리는 일들이 너무 많아졌다. 나라의 중대사부터 흔들리니 가정사 개인사까지에도 흔히 `아님 말구'의 꼬리표가 붙는 건 당연지사 아닐까. 신행정수도이전을 비롯해 국보법 폐지, 과거사 규명, 대입제도 변경, 화폐개혁설까지 어느 것이 확실하고 아닌지가 자꾸 불분명해지는 감이다. 최근엔 우리의 경제전망이 국제적인 설전의 도마위에도 올랐다. 해외에서는 모두 아니라는데 우리 정부만 장밋빛이라 우기는 거 아닌지 허실을 헤아리기가 힘들다. 혹여 그냥 한번 민의를 떠보고자, 아니면 말고 식으로 내비친 속내들이라면 그 막심한 폐해도 고려해 거두어들임 또한 빠를수록 좋다. 시류에 오염된 것인가. `아님 말구'는 강단에선 나의 입에서도 종종 걷잡을 수가 없다. 일껏 진도가 잘 나가다 가도 막판에 토를 달고 만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방송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라 내 경력을 내세워 차후 방송스타를 초청해 보겠다, 드라마녹화 현장 답사를 꼭 하겠다 말해 놓고는 나도 모르게 `아님 말구'로 꼬리를 붙인다. 학생들은 “와-” 웃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다. 혹시 `말구교수'란 별호가 붙지나 않을까 씁쓸해 진다. 또 하나 마침 사는 곳이 김포이고 고향이 광명이고 직장 등 주행동반경이 수도권인데 보이는 곳마다 `아님 말구'의 꼴불견들이 참 많다. 김포 신도시, 굴포천 운하, 김포공항과 인천국제공항, 광명 고속철역 등 하나 같이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첫 일의 시작에서부터 중간, 끝까지 엄청난 계획차질을 빚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국민 혈세의 낭비현장으로 지적받고 있다. 따지면 통일대비라 둘러대기 일쑤다.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조자룡이 헌 칼 쓰듯 마구 써 먹지만 언제 그런 날이 올지 요원한 얘기인듯 싶은 데 우선 당장을 피하고 입 막자는 꼴 아닌가 싶다. 이제 `아님 말구'의 반의어인 `그럼 좋구'(그러면 좋고)의 국가정책, 시책으로의 전환이 시급해지고 있다.
 
공자 말씀에 삼인행필유사(三人行必有師)라 해서 세 사람이 가다보면 그들 중 필히 스승이 나온다 했고, 부디 닮지 말라는 뜻에서 철부지 어린애도 때론 어른의 사부가 된다고 했다.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 누구나의 스승은 도처에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나 또한 노 할머니로부터 진솔한 생활철학의 가르침을 받아온 셈인데 오래 안 보이시니 아쉽고 근심걱정도 커진다. 혹시 환우중이라면 쾌차를 빌며 나라가 하는 일마다 “그럼 좋구”의 세상으로 빨리 돌아왔으면 참 좋겠다.

이현규 객원논설위원
(동아방송대 교수·前MBC워싱턴지사장)
(hklee@dabc.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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