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적 986.98㎢... 17년 전 보다 3배 이상 늘어

 

거주 인구 100여만명 늘어난 260만3천여명

이파트 37만여 가구.자동차 77만여대 질주

88년 당시 인천시청 핸드볼팀 전국대회 첫 우승

인천대 종합대 승격... 교수 직선 총장 후보 선출

 

기호일보가 창간된 88년은 서울올림픽이 열린 것을 비롯해 인천일보와 중앙의 한겨레신문 등 언론사의 잇따른 창간으로 언론자유의 붐이 일었던 해로 기억되고 있다.

그로부터 무려 17년이 지난 현재는 인천의 옛 모습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모든 것이 변해 한마디로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실감케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본보는 창간 당시인 88년 당시와 지금 인천의 생활상을 비교해 인천이 얼마만큼 다른 모습으로 변했는지를 되짚어 보도록 했다. 〈편집자 주〉

17년의 세월을 넘어 인천은 백제 시조 온조의 동복형인 비류가 현재의 인천에 정착

▲ 옛 인천시청사(현 중구청사)
해 `미추홀'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 인천지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삼국시대와 고려 그리고 조선을 거친 후 인천이 시로 개칭된 것은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다.

▶시세 급팽창=63년 부천군 관할이던 작약도를 병합한 후 68년 구 설치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중구와 동구, 남구, 북구 등 4개 구가 설치되고 81년 7월1일 직할시로 승격됐으며 비로소 88년 남구를 남구와 남동구로 북구를 북구와 서구로 나누면서 일선행정구가 6개구로 확대됐다.

88년 인천은 6개구 208.32㎢의 면적에 99개 법정동과 94개 행정동, 2천263통 1만2천536반으로 인구는 41만여가구에 161만6천여명(남자 81만3천여명, 여자 80만2천여명)이 거주했다.

17년이 지난 현재(2004년 9월말 기준)는 기초단체가 4개가 는 10개 군·구에 면적도 당시의 3배 이상이 늘어난 986.980㎢로 인구는 90만1천여가구에 260만3천여명(남자 131만9천여명, 여자 128만4천여명)으로 가구는 50만여가구 인구는 100여만명이 늘어나 비약적 발전을 보이고 있다.

주거형태별로 보면 당시와 현재를 확연히 비교할 수 있는데 88년 당시 인천지역 아파트는 주로 서민형인 15평 미만이 주를 이루면서 전체 가구수는 2만2천135가구인 데 반해 현재 인천지역 아파트 수는 37만1천여가구로 17년만에 18배나 늘어났다.

▶자동차 급증=88년 당시만 해도 생활수준을 반영해온 자동차 등록대수는 자가용 6만9천대, 영업용 1만1천여대에 불과했으나 현재는 자가용이 인천지역 가구수에 육박하는 73만2천여대에 영업용은 4만6천여대에 달하고 있다.

자동차가 늘어나면서 이에 따른 교통사고도 뒤따르는데 88년 당시 교통사고는 9천323건이 발생해 227명이 사망하고 1만여명이 부상했으나 2003년에는 모두 1만3천여건이 발생해 244명이 사망하고 2만1천여명이 부상해 교통사고는 크게 줄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 옛 수인선 송도역 모습
자동차 단속 건수를 보면 88년도 위반건수는 14만여건으로 주 위반사항은 신호위반이 1만2천여건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회전위반 1만여건, 차선위반 1만여건, 속도위반 5천여건 추월 2천여건, 음주운전 386건, 무면허 13건 등이다.

그러나 현재의 자동차위반건수는 모두 53만4천여건으로 88년과 비교해 신호위반보다는 도로여건 향상과 시내 주행속도 조정으로 속도위반이 21만1천여건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신호위반 4만1천여건이 뒤를 이었으며 당시와 달리 음주운전과 무면허가 각각 2만여건과 6천여건으로 크게 늘어났다.

▶범죄발생 추세=사회의 건강성을 엿볼 수 있는 범죄발생 건수는 88년 당시 살인, 강간, 방화 등 강력범죄는 385건이 발생해 339명이 검거됐으며 사기, 횡령, 배임 등 지능범죄는 2천750건이 발생해 2천404명이 검거됐다.

그러나 17년이 지난 현재는 강력사건이 680건이 발생해 633명이 검거됐으며 지능범은 9천699건이 발생해 8천273명이 검거되는 등 사건·사고도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소년범죄는 88년 당시 강력사건이 191건, 절도 766건, 폭력 1천549건 등이 발생했으며 현재는 3천328건이 발생해 이중 강력범 139건, 절도 875건, 폭력 1천99건, 지능범죄 266건이 발생하는 등 당시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88년 역사기록=그러면 88년 당시 인천에는 과연 어떤 일이 있었을까.

88년 2월 인천상공회의소가 지금의 `경인방송'격인 지방 TV방송국 설립을 문공부에 건의했으며 인천시청 핸드볼팀이 제5회 대통령기 전국남녀핸드볼대회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고 인천을 연고로 한 프로야구 태평양 돌핀스 창단 환영식이 시민회관에서 같은 해 3월 개최됐다.

4월26일 시행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정화, 심정구, 이강희, 강우혁, 정정훈, 이승윤, 조영장 후보가 당선됐으며 7월15일 인천신문(인천일보 전신)이 창간된 데 이어 5일 후인 20일 기호일보가 창간, 힘찬 닻을 올렸다.

8월7일에는 동산고가 제42회 황금사자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22년만에 전국을 제패했으며 인천대가 문교부로부터 종합대로 승격 승인된 데 이어 같은해 12월 인천최초로 교수직선에 의한 총장후보 선출이 시도됐다.

당시 사건·사고로는 주안동 주민 100여명이 주안역 뒤편 연탄공장의 이전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였으며 대우자동차 노사분규가 11개항에 대해 노사가 합의함에 따라 19일만에 분규가 타결됐다.

7월에는 동춘동 앞바다 2천ha에서 어패류가 대량 폐사해 인천시가 원인규명에 착수했으며 11월에는 만수주공 임대아파트 3단지에서 가스폭발사고가 발생해 1명이 사망하고 20여명이 중경상을 입는 피해를 냈다.

같은 해 12월에는 내무부가 89년 1월부로 계양면과 영종·용유면 등을 인천에 편입키로 하고 편입안을 국회에 상정했으며 계양·용유면 주민 1천여명이 인천시 편입지지대회를 국회의사당 광장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