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번의 외침...등대같은 길잡이 역할 충실

 

1988년 7월 20일 기호신문 창간호 발행

1988년 11월 28일 기호일보로 제호 변경

1989년 12월 8일 석간에서 조간으로

1994년 5월 31일 선린동 사옥으로 이전

2004년 12월 1일 인터넷 홈페이지 새 단장

 

불가에서는 아주 짧은 시간을 찰나(刹那)라 하며 상대적으로 한량(限量)이 없는 세월을 무량겁(無量劫)이라고 한다. 인간이 무량겁을 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야속하게도 1세기조차 채우지 못하고 사라진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이치가 그러하건만 인간은 평생동안 끝없는 욕망을 꿈꾸다 사라져 가고 또 다른 생명이 잉태돼 역시 같은 삶을 살다 간다.
 

`공정·책임·정론·진실'이라는 사시를 걸고 지난 1988년 7월20일 창간한 기호일보가 2005년 1월27일자로 지령 5000호를 맞았다.
 

지난 1987년 6월29일 언론 자율화가 단행되면서 같은 시기 창간됐던 많은 신문들이 경영상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해 흔적 없이 사라지고 또 다시 창간되는 악순환이 거듭돼 왔다.
 

소리를 하는 이들은 피를 토해 득음(得音)을 한다고 한다. 이제 창간 5000호를 맞은 기호일보는 피를 토해 득음을 하는 자세로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될 것과 다시 한번 제2창간의 마음가짐으로 10000호를 위해 정진할 것을 독자제위께 다짐한다. 〈편집자 주〉




◇기호일보의 창간과 변천사
 

▲ 인천시 동구 화도진 도서관에는 기호일보가 창간호부터 영구보존되고 있다./장용준 기자 jyj@kihoilbo.co.kr
노태우 대통령이 지난 1987년 6·29선언을 통해 언론자율화를 선언하면서 같은 해 11월11일 언론인의 족쇄를 채워왔던 언론기본법이 폐지되기에 이른다. 이는 그동안 1도1사제로 인해 많은 이들이 강제적으로 언론을 떠나야 했던 암울한 시기가 걷히는 신호탄이 됐다.
 

당시 졸지에 직장을 잃고 거리로 내몰려야 했던 해직기자들은 그나마 글을 쓸 수 있다는 위안으로 서강훈(현 기호일보 대표이사)사장을 중심으로 1975년 10월10일 인천시 중구 중앙동 3가 1번지에 사옥을 마련하고 `경기교육신문'을 창간해 활동하고 있었다.
 

급기야 언론자율화가 이뤄지면서 1988년 5월25일 문공부로부터 정기간행물 등록증이 교부됐으며 같은 해 7월20일 인천시 중구 중앙동 1가 1번지 사옥에서 (주)기호신문사로 꿈에 그리던 창간을 맞았다.
 

당시 108명의 임·직원들이 석간으로 발행한 20면의 창간호는 `지방화시대의 길잡이…, 여기 진실의 소리갗라는 1면 제목을 달고 인천과 경기도 전역에 배포됐다.
 

이렇게 세상에 존재를 알린 기호신문은 그 해 11월28일 `기호일보'로 제호를 바꿔 발행되다 이듬해 12월8일 석간에서 조간으로 변경되게 된다.
 또한 1989년 7월 월간 수도권 화보가 발행되면서 많은 독자층의 호응을 얻었다.
 

이 뿐만 아니라 1994년 5월31일 현재의 사옥인 인천시 중구 선린동 3번지로 옮겨 선린동시대를 맞았으며 그 후 10개월여 만인 이듬해 3월1일에는 16면을 동시에 발행할 수 있는 컬러윤전기가 도입됐다.
 

또 전산실의 CTS를 비롯, 화상편집기와 데스크탑 등이 도입되면서 취재와 동시에 전송, 편집, 제판, 인쇄가 이뤄질 수 있는 첨단시설이 갖춰졌다.
 

게다가 수도권 지역의 신세대 독자들이 급증하면서 지령 2650호(1997년 4월13일)부터 한글전용 전면가로쓰기가 도입돼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IMF관리체제란 혹독한 시련이 닥치면서 1998년 3월20일 창간했던 소년기호일보를 그 해 12월20일 폐간해야 했으며 제2창간 차원에서 2000년 3월27일 경인연합일보로 본지의 제호를 변경하기도 했으나 같은 해 9월19일 다시 기호일보로 변경하는 혼돈의 시기를 맞기도 했다.
 

특히 경인지역 교육발전을 선도해 오며 기호일보 창간의 모태가 됐던 주간지 경기교육신문도 2001년 7월1일 휴간해야 하는 등 많은 시련을 겪었다.
 

이후 기호일보는 2003년 3월1일 새 윤전기를 도입하고 같은 해 12월23일 월간 수도권화보 역시 `Photo기호'로 변경했으며 2004년 12월1일자로 인터넷 홈페이지(kihoilbo.co.kr)를 새롭게 단장, 전자신문으로도 신속 정확한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편 기호일보는 본보가 단독 입수한 지난 1992년 3월1일자 `일제의 작두처형' 사진을 시작으로 최근 안양지역 `한국종단송유관의 기름유출사고’ 등 창간 이후 크고 작은 특종으로 애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지역사회를 위한 행사
 

기호일보는 지난 2002년 12월 지역발전을 위한 `제1회 아름다운 인천찾기대회'를 통해 정체성 확립에 주력해 왔으며 올해 4회째를 앞두고 있다.
 

이 행사에는 매년 수만여명의 인천지역 학생들이 참가해 우리의 고장 인천의 아름다움을 화폭과 원고지에 남겼으며 아울러 지역발전을 위한 캐릭터 공모전 등을 통해 지역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또 지난 2003년 5월 시작된 `제1회 인천해양축제'는 지난해 2회째를 맞아 명실상부한 인천지역 대표축제로 자리매김했으며 행사 때마다 수만여명의 시민들이 한 데 어울려 즐거움을 나눴다.
 

특히 지난해 6월 기호일보와 인천시 남구청이 함께 추진한 `6·15남북공동성명 기념 우리민족대회 통일염원 청소년 그림 그리기, 글짓기 대회'에는 1만여 학생들이 참가해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을 화폭과 원고지에 담아 북측 관계자들의 심금을 울리게 하기도 했다.
 

아울러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경인전철 주안역 광장에서 옛 시민회관~신기촌에 이르는 도로에서 웅장하게 펼쳐진 통일염원 거리 퍼레이드는 인천지역 최초의 범시민 퍼레이드로서 실로 인천시민들의 통일에 대한 열기를 하늘 높이 울려퍼지게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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