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줄을 중시하는 민족성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입양에 대한 거부감이 많다. 부부 중 한 쪽이 아이를 가질 수 없을 때라도 입양에 대한 선입견이 커 부모와 같은 혈액형이 아닌 이상 선뜻 내키지 않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불임부부들이 입양 외에 유일한 대안으로 선택하는 것이 정자은행을 통한 인공수정인데 이는 무정자증의 아버지를 대신해 다른 건강한 남성에게 정자를 제공받아 수정을 시도하는 것으로 입양에 비해 어머니의 유전적 특성을 물려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국내에서는 지난 2000년에 서울대병원이 정자은행을 개설해 안전성과 공익성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관리를 해오며 정자의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에서 불임부부들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또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불임부부 이외에 동성애부부와 독신여성을 대상으로 정액분양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으며 중동국가들 가운데는 계속되는 전쟁으로 군인들만의 정자를 따로 보관해 군인들이 사망할 경우 미망인이나 여자친구가 이들의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한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정자은행을 선택한 이유들이야 어찌됐든 분양정액으로 잉태돼 성장한 사람들 가운데는 나중에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고 심각한 `정신적 공항'에 빠져들면서 입양 못지않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더욱이 부모가 끝까지 이들을 양육하지 못하고 결혼생활의 파경을 맞는 경우는 더하다. 최근 서울가정법원은 “친생자 관계의 존재 여부는 자연적 혈연관계에 의해 정해진다”며 인공수정으로 낳은 아들과 아버지는 친생자 관계가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앞서 지난 2000년 법원 판결에는 부인이 혼인 중 임신한 자녀는 남편의 자녀로 추정한다는 민법상 규정을 들어 “인공수정으로 낳은 아이도 남편의 자녀로 봐야 한다”는 상반된 판결을 내놓았다. 아직까지는 이같은 소송이 흔치 않아 사회적 파장이 덜하지만 대법원 판례도 없는 상황에서 인공수정으로 태어난 자녀의 친생관계를 명확히 하기란 쉽지만은 않을 듯 싶다. `자연적 혈연관계'를 고집해가며 낳고 기른 자녀가 순전히 부모의 이기적인 판단 때문에 결국은 `생물학적 부모 자식 관계'를 심판받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淑)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