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만주노령지역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동휘 선생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지난달 31일 밝혔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선생은 1873년 함남 단천에서 태어나, 단천군수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던 통인으로 생활하던 중 단천군수가 패행을 일삼자 이를 질타한 뒤 불화로를 군수의 머리에 뒤엎고 상경, 사관양성소에 입학했다.

육군 참위로 임관, 서울의 관문이자 국방의 요충인 강화도 진위대장까지 됐으나,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1905년 3월 군직을 사임한 뒤 강화도에 보창학교 등 사립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운동에 뛰어들었다.

1907년부터는 서북학회 임원으로 교육계몽 운동과 비밀결사 신민회의 지도자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면서 장로교 전도사로 함경도 일대에서 선교 활동을 벌였다. 그러다 1911년 이른바 `신민회 사건'에 연루돼 인천 앞바다에 있는 무의도에서 1년간 유배되는 고초를 겪었다.

1913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권업회에 참여, 동포사회의 단합과 독립의식을 고취시켰으며, 1914년 만주와 러시아의 민족운동세력을 규합한 대한광복군정부의 지도자로 독립전쟁계획을 총지휘했다.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 후 연해주로 돌아가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혁명세력과 연대한 항일투쟁을 주장하며 한인사회당을 창당했으며 3·1운동 직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로 취임, 러시아에 특사를 파견해 레닌 정부로부터 자금지원 약속을 받아내고, 무장투쟁노선을 채택하게 하는 등 임정의 독립운동 노선을 강화하는 데 노력했다.

1921년 초 개혁을 요구하며 임정을 탈퇴한 후 상해에서 고려공산당을 창당하고,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여해 한국의 독립을 요구했다.

나아가 국제공산당에서 한인의 이익을 대변하고, 또 국제혁명가후원회 위원으로 혁명운동 과정에서 희생되고 고통 받는 혁명가와 그 가족들을 돕는 활동을 꾸준히 펴다가 1935년 1월31일, 62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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