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껍질을 안주 삼아 소주가  들어가니  40년두더지 인생이 주마등같이 스쳐가나 보다. 햇볕에 그을려 한때 구릿빛이었을 피부는 윤기를 잃고 주름만 잔뜩 늘었다. 삽질, 호미질, 괭이질을 견디지 못한 열 손가락에는 모두 지문이 지워진 지 오래인 듯했다.
   
농부? 그래 맞다. 아직도 발굴현장에 나가 당당히 현역으로 활동하는 아침  9시 부터 오후 5시까지 '정규 근무시간'을 제외한 새벽과 저녁에는 농사를 짓고  있으니 농부라는 말이 틀리지도 않다.
   
30년 경주 발굴현장 동지인 윤근일(尹根一.59)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이 한 턱낸다며 마련한 경주의 한 돼지 껍질 소줏집에 '용만 반장'으로 통하는  김용만(金容滿.74) 씨와 '최 반장' 최태환(崔泰煥.63) 씨가 자리를 함께했다.
   
윤 소장이 즉석 모임을 '소집'한 것은 2일 오후. 마침 전날부터 이날  오전까지 많은 비가 내려 현장 인력을 감독하는 경주 분황사 현장이 발굴을 쉬는  바람에  두반장은 이날 각자 집에서 농삿일을 돌보고 있었다.
   
이 자리는 "발굴현장과 평생을 함께한 노장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기자의 요청을 윤 소장이 흔쾌히 받아들여 마련됐다.   '

용만 반장'은 다행히 집에서 곧바로 집으로 전화 연락이 닿아 '소집'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최 반장'의 연락은 다소 우여곡절이 있었다. 휴대전화도 없는 데다 집에 아무도 없어 연락할 방법이 묘연했다.
   
경주문화재연구소 다른 직원이 연락을 했으나 여의치 않자, 역시 관록은 무서웠다. 휴대전화를 꺼내든 윤 소장은 '최 반장'의 딸에게 전화를 넣었다.
   
그 대화를 엿듣자니 대강 이랬다. "○○냐? 나 윤 소장인데 아버지 어디  계셔? 연락이 안 된다. 그래? 그럼 아버지께 말씀 드려서 7시까지 ○○돼지  껍질  집으로 나오시라고 해라."
   
농사일 중이라 '최 반장'은 연락이 힘든 모양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결국  윤소장 부탁을 받은 딸이 아버지가 일하는 논으로 달려가서 모임을 알린 모양이다.
   
해방 이후 한국 고고학의 본격 발굴은 경주관광개발계획 일환으로 1973년에  조사가 이뤄진 천마총 발굴에서 그 출발점을 삼는다.
   
윤 소장과 두 반장은 초창기 경주지역 거의 모든 발굴현장을 조사원과 작업반장으로 고락을 함께했다. 경주 고고학 발굴사의 살아 있는 역사이자 주역인 셈이다.
   
연신 돼지 껍질을 구워대는 불판을 중심으로 20년 이상 경주연구소에  봉직하고 있는 유홍식, 이상구 씨가 동석해 둘러 앉자마자 이들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냈다.
   
그중 어떤 것은 기자로서 또다른 경주 발굴의 주역으로 꼽히는  조유전(63)  전국립문화재연구소장의 '발굴이야기'(1997)와 같은 증언록이나 직접 증언으로 듣기는했다. 그러나 직접 당사자가 세 명이나 모여서인지, 그 어느 발굴 회고담보다  생동감이 있고 자세했다.
   
조유전 소장이 '발굴이야기'에서 고백해 유명해진 일화 중 하나가 1969년, 경주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20㎞ 떨어진 경주시 강동면 안계리 고분군 발굴 현장의 '해골물 마시기'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당시 발굴 조사팀장인 조 소장과 함께 해골 물을나눠 마신 사람 중에 김 반장과 최 반장도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지금도 그런 전통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무덤 속에 맺힌 물을 마시면 무병장수 한다는 속설이 있다. 한데 이 안계리 고분군 중 한 곳에서 물이 가득 고인 신라토기가 출토됐다. 이를 조 소장 이하 발굴 참여자들이 나누어 마셨단다.
   
경주 지역 현역 최고참 조사원인 '용만 반장'이 말했다.
   
"요즘이야 요구르트 빨대라도 있지만, 그 때 그런 게 있었나. 갈대같은 것을 구해서 순서대로 빨아 마셨지. 한데 말이오, 그런 소식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부산에사는 어떤 사람이 자기도 그런 물 좀 마시게 해 달라고 조릅디다."
   
그에 의하면 당시 모든 발굴참여자가 고루 '해골 물'을 마신 것은 아니었다. 꺼림칙하게 생각한 사람들은 피했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다 빨아먹고 난 토기 바닥에는 진흙 앙금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진짜 해골 물이었을 리는 없을 테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물이 토기 안에 고여 있었던 모양이다.
   
천마총 이후 1970년대 '작업 반장' 4인방 중에서는 이들이 여전히 왕성하게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초대 천마총 반장이며 '용만 반장'보다 한 살 많은  김기출씨(1930년생)는 3년 전에 타계했다. 김형도 반장도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다. '용만반장'은 천마총 제2대 반장이었다.
   
두 반장이 발굴 현장과 인연을 맺은 것은 공교롭게도 1966년 경주 방내리  유적발굴로 함께 거슬러 올라간다. '용만 반장' 회고에 의하면 당시 조사팀장은  강인구현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였고, 내년 초에 정년퇴임하는 김병모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와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조사원으로 활동했다.
   
경주 토박이인 최 반장에 견주어 '용만 반장'은 '촌놈'이었다. 같은 경주  권역이지만, 그는 감포 출신. 고향을 묻는 질문에 자리를 함께한 유홍식 씨가 "촌놈이세요"라고 거드니, '용만 반장'은 "에끼 이 사람이 내가 왜 촌놈이야"라며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두 노 반장의 두더지 인생을 듣자니 특히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두 사람  모두자기 집을 자기가 발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최 반장이 설명하는 사연은 이랬다.
   
1976년, 정부에 의해 황룡사 발굴이 결정되면서 이 일대 주민 철거가 있었다.
   
최 반장 회고에 의하면 그 때까지 황룡사 터에는 모두 57가구가 살고 있었다.
   
"내 집은 황룡사 강당 자리였고, 저 형님(용만 반장)은 목탑지 동편에 살고  있었어요. 발굴이 결정되면서 우리는 보상을 받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했는데,  참인연이란 게…. 나는 황룡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만 34년을 살았는데 내 집을 내가 발굴하다니…."
   
황룡사 토박이여서 최 반장은 1968년 무렵에 일어난 유명한 황룡사 심초석 유물 도굴사건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도굴범은 윤○○하고 최○○였는데, 지렛대로 심초석을 들추는 일은  김○○가 했어. 내가 왜 이 일을 자세히 기억하느냐 하면, 범인들이 잡혀 현장 검증을 할  때 내가 그걸 봤거든. (황룡사 찰주본기를 비롯한) 도굴 유물들은 서울의 이○○씨  한테 가 있었지. 이들은 황룡사를 해 먹고(도굴하고)는 석가탑도 털었어."
   
윤근일 소장에 의하면 이들 중 윤○○는 경주박물관에도 잠깐 근무했고, 최○○ 는 나중에 경주관광개발계획에 의해 이 지역 발굴조사를 위해 출범한  경주사적관리 사무소에서 일용직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도굴 경력자들을 고고학 조사에 활용하기 위해 고용했던 셈인데, 이 일은  결국 당시 언론에 폭로됨으로써 경주사적관리사무소는 한바탕 홍역을 치르게 된다.
   
황룡사 발굴과 관련된 일화로 최 반장은 목탑 심초석 조사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이 심초석은 화강암 두 개를 포갠 일종의 이중구조였다. 바탕 심초석 위에 상대적으로 작은 다른 심초석을 포갠 형태였다. 이 중에서도 바탕 심초석은 무게가  24t에 이른다.
   
"심초석을 들 수 있는 기중기가 있어야지요. 당시 국내에는 딱 한 대밖에  없었는데 포항제철이었습니다. 포철에 부탁해서 100t짜리 기중기를 포항에서 끌고 와 작업했습니다. 황룡사 터로 통하는 지금의 도로는 그 때 이 굴착기를 현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닦아 놓은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황룡사 목탑 심초석을 조사를 겨우 하기는 했으나, 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조사를 위해 드러낸 심초석을 다시 제자리를 앉히는 문제였다.
   
"기중기로 그 무거운 돌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데 아구(아귀)가 안 맞아요. 다섯번 시도해서 겨우 맞췄습니다. 우리가 이랬는데 신라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기술로 수평을 맞췄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들도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일까. 아니면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 때의  낭만이 더욱 크게 부각되어서일까. 요즘 발굴현장 세태를 한결같이 안타깝게 바라본다.  전조사원이 가족 같았던 70년대 발굴현장이 삭막하게만 변했고, 그에 덩달아 조사인부들에 대한 처우도 훨씬 안 좋아졌다고 입을 모은다.
   
'용만 반장'은 화려했던 그 때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그리워했다.
   
"문화재 발굴현장을 방문하신 대통령이 누가 있습니다. 박 대통령밖에 없습니다.박 대통령은 여러 번 경주 발굴현장을 찾아주셨습니다. (그 이후) 다른 대통령은 문화재에 전혀 관심을 안 보이고 있습니다. (70년대) 그 때 우리는 세상 부러운 줄 몰랐습니다. '경주사적관리사무소'라는 글자를 새긴 노란 모자를 쓰고 경주 시내를 활보했습니다. 아무 식당이나 외상이 되었지요."
   
신라 금관에서 모티브삼은 노란 모자를 당시 조사반원들은 쓰고 다녔다고 한다.
   
윤근일 소장이 거들었다.
   
"내가 미안해 죽겠어. 일당이 말이야, 반장은 3만8천원이고, 다른 조사반원은 3만5천원이야. 내 마음대로 올릴 수도 없고…. 수 십년 동안 묵묵히  현장을  지켜준 이분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
   
두 반장 회고에 의하면 그들과 같은 조사반원들의 전성시대는 황룡사 발굴 초반기 무렵까지 계속됐다. '용만 반장'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의 전폭적 관심과 지원에 힘입어 인부 임금은 발굴현장이 다른 건설현장을 압도했으며, 그래서 많은 노동인력이 발굴현장에 몰렸다. 다른 건설현장에서 오라고 해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가장 조사인부가 많았던 곳은 1975-76년 무렵 대대적으로 발굴된 안압지  조사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조사인력만 280여 명을 헤아렸다. 이들은 네 개 반으로  조직됐는데, '용만 반장'과 최 반장 외에 고 김기출ㆍ김형도 씨가 각각 반장을 맡아  감독을 했다.
   
워낙 인력이 많다 보니 관리가 무척이나 힘들었다고 한다. 윤근일 소장의 회고.
   
"안압지는 호안석축(연못가를 둘러가며 쌓은 석축) 길이만 1천200m가 넘어.  조사 현장이 워낙 넓었어. 술 먹고 노는 사람도 많았고. 그런 골치아픈  인부  관리를이 두 양반이 도맡아 했지."
   
이 안압지 조사와 관련되는 또 다른 일화 한 토막을 최 반장이 거들었다.
   
"퇴근 시간에 출입구에서 (인부들에 대한) 도시락 검사까지 했습니다. 발굴현장에서 수습한 유물을 몰래 갖고 나갈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들은 1966년 안계리 발굴 이후 1969년 방내리 고분 유적을 거쳐 1973년  천마총 발굴이 시작을 알린 경주지역 대규모 발굴조사에서 빠진 적이 없다. 경주의 발굴현장, 그곳에는 어김없이 이들이 있었다. 천마총 발굴 종료 시점에 시작된 황남대총북분과 남분 조사에도, 황룡사에도, 안압지에도, 경주 왕경에도 어김없이 그들은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워낙 노하우가 쌓이다 보니 다른 지역으로 '영역'을 확장하기도 했다. 황룡사 발굴을 끝낸 다음 '용만 반장'은 '백제'로 진출했다. 익산  미륵사지와 공주 송산리 고분군 중 4각 방단(方壇) 조사도 그의 몫이었다. 말하자면  스카우트된 셈이었다.
   
"당시 백제지역은 경주에 비해 발굴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발굴 인력도 턱없이 부족했지요. 그래서 현장에서 인부들을 가르치며 조사했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유홍식 씨가 거들었다. "황룡사를 세운 이는 백제인 아비지였지만, 백제의 익산 미륵사지를 발굴한 이는 신라인(의 후예)이지요."
   
한국고고학의 산증인인 이들은 지금도 분황사 발굴 현장에서  여전히  반장으로 활동 중이다. 최 반장의 경우 인부 15명을 감독하고 있다. 한데 반장인 자기 나이가 가장 어리다고 한다.
   
'용만 반장'이 거들었다. "심각한 고령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노인 외에 발굴현장에 오질 않아요. 그 일당으로 일할 사람이 있나요?"
   
하기야 요즘 여느 국내 발굴현장에서도 젊은이를 보기는 어렵다. 모두 60대  이상 노인들이 발굴에 종사하고 있다.
   
그렇다고 비관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일은 하고 싶으나 마땅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노인들의 일자리 창출에 그 나름으로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발굴현장 인부 중에는 별의별 '전력자'가 다 있다고 한다. 전직 경찰관도 있고, 기자 출신도 있으며, 교직을 정년퇴임한 사람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그와 관련되는 일화 한 토막을 최 반장이 소개했다.
   
"전직 경찰관 한 분은 한동안 어떤 사람인 줄 몰랐어요. 우리만 해도 경찰관 하면 죄지은 것도 없는데 괜히 겁나서 피하는 거 있잖아요. 한데 이 양반은 경찰이 와도 꿈쩍도 안 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경찰이었더구만요."
   
이런 이들에게 의례적인 질문을 던져봤다. "후회없나요?"
   
40년 발굴 인생 중 조사현장을 오토바이로 오가는 와중에 교통사고로 정말로 죽을 고비를 세 번이나 넘겼다는 '용만 반장'이 대뜸 받아쳤다. "후회했다면 지금까지 왔겠습니까? 나는 반평생 이상을 우리 문화재에 바친 내 인생이 자랑스럽습니다. 한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최 반장이 말을 이었다.
   
"발굴에 종사하며 나는 다섯 딸을 잘 키웠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이상 죽을 때까지 현장과 함께할 것입니다."
   
결코 쉽게 외부로 이름이 쉽게 드러날 수 없는 그들의 묵묵한 공로를  보상하기에는 국가훈장도 역부족일 것이다. 불판의 돼지 껍질 안주처럼 새까맣게 타기만  하다가 이제는 더 이상 타 버릴 것도 없는 저들을 후세의 역사는 기억이라도 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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