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관광부는 단군신앙에 기반한 대종교(大倧敎)를 중광(重光)해 종교운동, 국학운동, 항일운동을 펼친 홍암(弘巖) 나철(羅喆·1863~1916)을 `9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나철은 전남 보성 벌교읍의 양반가에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해 벼슬이 부정자(副正字)에 이르렀다.
 
그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1907년 매국 대신들의 암살을 기도했다가 거사 직전에 탄로가 나 신안군의 지도(智島)에 유배되기도 했다.

그는 개화사상에 눈떠 여러 차례 일본을 오가며 외교적 독립을 외쳤는데, 을사오적을 암살하려 했던 것 등은 모두 유학자의 안목에서였다. 그가 국학자로 변신한 것은 단군신앙을 만나면서였다.
 
그는 대종교 중흥을 계기로 국어·국문·국사·국교를 회복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노예적 사관에서 자주적 사관으로, 유·불 정신에서 신교(神敎) 정신으로, 한문어를 국문어로 혁신해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고자 했다.
 
나철은 망국으로 치닫는 격변기에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존재한다'(國亡道存)며 민족의 정신을 지키고자 했고, `단군교포명서'나 직접 작사한 노랫말 등을 통해 보여준 순수한 우리말 구사능력은 주시경·김두봉·이극로 등으로 이어진 한글운동의 동인이기도 했다.

그의 반존화적 역사관과 신교적(神敎的) 정신사관은 김교헌·박은식·신채호 등의 근대민족주의 사학으로 이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최치원의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에 나타나는 국교의식을 통해 `풍류도'야말로 국가적·민족적·영토적·문화적 통합에 의해 형성된 한국 고대의 가장 뚜렷하고 독창적인 종교, 사상, 문화로 파악하기도 했다.

일제의 학정을 통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그는 백두산 북쪽 기슭인 만주화룡현 청파호 언덕에 묻혀 있다.

그의 문화인물 지정을 기념하는 학술행사가 국학원과 홍암나철선생기념사업회주관으로 오는 13일 오후 2시 세종문화회관 콘퍼런스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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