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관광부는 항일기의 국학자 안확(1886~1946) 선생을 2003년 `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고 기념사업을 펼친다.
 
서울의 중인마을에서 자란 그는 관립 수하동 소학교를 다녔으며 1896년 발족한 독립협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청년기에 유길준의 `서유견문'과 중국인 량치차오의 `음빙실문집'을 통해 서양사상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다.
 
그는 1910년 국권을 빼앗긴 뒤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다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1916년경 다시 마산으로 돌아와 윤상로, 이시영 등이 조직한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장을 맡아 3·1운동때 마산시위를 주동했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1921년 조선청년회 기관지 `아성'의 편집인 등으로 활동했다. 1928년부터는 이왕직아악부에서 촉탁으로 일하면서 음악 및 국문학 관계의 방대한 왕실 소장 자료들을 통해 훈민정음의 악리 기원설, 가시 장르 설정(삼대목체·정읍체·첩성체·경기체·장편·시조) 등의 업적을 남겼다.
 
그는 국권을 빼앗긴 뒤 지식인들이 서구문명 우월주의에 빠져 드는 것을 경계하여 민족문화의 장점 발견이 곧 독립의 길이라는 신념으로 국학 연구에 몰두했다. 1930년대 초에 일본의 식민통치가 본격화되자 국학 연구의 한계를 느끼고 북간도, 연해주, 중국 대륙, 미국 하와이 등지를 전전하며 민족사의 유적지를 찾고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했다. 7년 만에 서울로 돌아온 그는 정인보 등 민족주의자들과 교분을 나누며 고구려 문학·시조·향가·미술사 등에 관한 연구활동을 재개했다.
 
생전에 `조선문법'(1917), `조선무사영웅전'(1919), `자각론'(1920), `조선문학사'(1922), `조선문명사(일명 조선정치사)'(1923), `시조시학'(1940) 등의 저서와 `조선어의 가치'(1915) 등 140여 편의 논문·논설류를 남겼다.
 
안확 선생의 문화인물 선정을 기념해 내년 1월24일 오후 2시 대우학술재단 세미나실에서 학술강연회, 같은 날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에서 학술대회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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