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은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본토의 면적 13%, 인구의 10%를 잃게 되고 1921년 4월까지 200억마르크의 배상을 지급해야 했다. 독일의 생산력은 전전의 반이하로 떨어졌고 전후의 인플레에다 베르사이유 조약에 대한 불만들이 표출되어 정국은 불안정하게 소용돌이 쳤다. 그런 중 1920년에는 제정(帝政)의 부활을 꾀하는 우익 정치가 카프와 장군 뤼트비츠가 이끈 `카프반란'과 이어서 공산당의 폭동, 1923년에는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뮌헨 반란' 등으로 국내는 심히 어수선했다. 게다가 1923년 1월 프랑스와 벨기에는 독일의 배상금 미납을 구실로 독일의 철, 석탄의 주요 산지이며 중공업의 중심지인 루르지방을 점령해 버렸다. 이에 그곳 독일인들은 `소극적인 저항'이라 하여 총파업 등으로 맞섬으로써 독일의 경제는 미증유의 인플레이션을 가져와 마르크의 화폐가치는 1조분의 1까지 추락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경제파탄으로 위기에 직면한 독일을 부흥시킨 인물은 192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슈트레제만(1878~1929)이다. 1923년 8월 슈트레제만은 사회민주당, 인민당 등과 `대연합정부'를 조직, 총리 겸 외무장관으로서 이 위기를 타개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우선 루르점령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을 종식시켜 인플레 요인 배제에 노력했다. 중부 독일에 성립하고 있던 공산정권을 진압해 국내의 혁명운동 제거에 성공했다. 또 재정가 샤흐트의 협력을 얻어 전국의 토지 등을 담보로 1조마르크를 1렌텐마르크로 교환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인플레를 극복했고 이듬해 금에 입각하는 라이히스마르크로 바꾸어 독일경제를 안정시켰다. 그는 미국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한 도즈안을 성립했고 국제적인 안전보장조약인 로카로노 조약을 성립시켜 독일과 프랑스, 벨기에의 국경 안정보장인 영구 비무장화 등에 성공했다. 한 정권의 잘못으로 패망한 나라를 다시 일구어나간 슈트레제만의 구국의 일념은 평생을 일관했다. 우린 지금 모든 분야가 불안정하기만한 상황에서 새로운 정치지도자가 탄생했다. 하여 슈트레제만과 같은 인재등용을 기대한다.
(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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