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바람

신명여자고등학교 1학년 12반 김효정

 
슬금슬금 아무도 모르게 다가와 몸을 조여오는 더위에 악몽을 꾸고 있다. 잠에서 깼다. 어떤 꿈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울며 소리쳐서 베개가 젖고 이불이 발 밑에 자리하고 있는걸 보면 무척 괴로운, 누군가가 죽는 꿈이었을 것 같다.
 
땀 좀 식힐 겸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나갔다. 거실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순간 무서워져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몇 분을 그 자리에 있어도 아까 들었던 흐느낌은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작게 심호흡을 하고 부엌으로 가서 물을 마셨다. 방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다시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겁먹지 않고 주위를 살며시 둘러보았다. 이내, 그 흐느낌이 어디에서 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부엌 옆쪽에 자리한 할아버지의 방문이 조금 열려있었고, 그 틈새로 빛이 새어나왔다.
 
울고 계셨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살짝 들여다 본 방 안에서, 할아버지는 손에 무언가를 들고 울고 계셨다.
 
아마 `무언가'는 내가 많이 닮은 할머니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리라.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1950년대에 헤어지셨다. 그 당시에 사람들이 헤어진 이유는 단 하나. 남북 북단. 반 세기가 지난 지금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살고 있음에도 할아버지는 항상 할머니를 그리워 하셨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자식이건만, 할아버지는 하소연 같은 이야기들을 자식인 아버지보다 손녀인 나에게 더 많이 하셨다. 나를 불러 이야기를 해 주시기 전에 항상 내 얼굴을 쓰다듬으시면서 할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말씀하셨다. 할아버지는 이 때문에 나를 불러 이야기하시는 건지도 모른다.
 
할아버지께서 나에게 해주시는 이야기의 순서는 항상 똑같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만난 이야기부터 두 분이 결혼하신 이야기, 아버지를 낳았을 때의 이야기 그리고 북새통에 헤어지신 이야기, 이야기를 다 마치신 할아버지의 눈에는 항상 눈물이 조금 맺혀 있었고, 이야기를 다 들어준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할아버지께서, 나에게 이야기를 하실 때나 북한에 대한 기사나 뉴스가 나올 때를 제외하고 저렇게 슬픈 표정으로 우시는 건 처음봤다. 요즘들어 할아버지의 모습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건 곁에 있던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아챌 수 있었다.
 
이산가족 찾는 것을 신청하여 온 몇 주 뒤부터 80대의 나이에도 정정하시던 할아버지는, 잘 걸리시지도 않던 감기에 심하게 걸리시고, 어떤 병에도 걸리지 않았는데 나날이 쇠약해지셨다.
 
그러나 지금처럼 밤에 홀로 우시기까지 하는 것이다. 나는 그저 아무것도 못 본듯이 조용히 내 방으로 돌아왔다.
 
할아버지께서 우시는 걸 본 그 날 이후로 할아버지는 더욱더 쇠약해지시더니, 며칠 후, 할아버지는 주무시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가셨다. 몸이 쇠약해지시는 걸 보고 미리 돌아가실 것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많이 슬프지 않았고 그 만큼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산가족 찾기 신청한 것에 대한 전화였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찾고 싶어하시던 할머니는 우리가 신청한 몇 주 뒤 돌아가셨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몸이 안 좋아지시기 시작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였다.
 
그 말을 듣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장례식 때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 흘러 내렸다. 바람이 불었다. 문득, 바람이 되어 북한으로 가고 싶다던 할아버지의 바람이 생각났다.
 
만약, 우리의 바람을 바람이 실어 북에서 휘몰아쳐 주었다면…. 이런 아픔도 없었을텐데, 흘러내리는 눈물 따위 바람이 모두 날려 주었을텐데.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