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조국' 프랑스의 부름을 받고 53세에 대위로 군대에 복귀한 마르크 블로크(1886.7.6-1944.6.16)는 1940년 5월 전투에서 프랑스가 독일에 패한 직후 다음과 같은 내용의 증언을 쓴다.

"나는 알자스를 떠나온 유대인 사이에 특별히 강렬한 애국적 전통을 중시하는 분위기에서 성장했고, 끝으로 오늘 일부 사람들이 프랑스에서 나를 몰아내려 하고(또 누가 알겠는가?) 혹시 그 일이 성공할 지 모르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프랑스는 내 조국이며 그곳에서 내 마음이 떠날 수 없다고 말하고자 한다.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고, 그 문화의 샘물을 마셨으며, 그 과거를 내 것으로 받아들였고, 프랑스 하늘 아래서만 편히 숨쉴 수 있으며, 나 스스로 최선을 다해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그래서일까? 20세기 초반 가장 혁명적인 역사가로 꼽히는 블로크는 조국 프랑스의 독립을 위해 레지스탕스 운동을 벌이다 1944년 3월 8일 게슈타포에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은 뒤 감옥으로 이송된 다음 파리 해방 직전인 그 해 6월 16일 다른 죄수들과 함께 고향인 리옹 근처 어느 들판에서 총살되는 순간 외쳤다.

"프랑스 만세"

유대인이라서 더 그랬을까. 프랑스인이기를 더욱 강렬히 자처했고, 그 스스로 프랑스를 조국이라 부르던 그는 끝내 프랑스인으로 죽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한 그는 1929년 뤼시앵 페브르와 함께 「사회경제사 연보」를 창간하는 한편 「왕과 농노」「기적을 행하는 왕」「봉건사회」를 비롯해 지금은 아날역사학의 고전이 된 묵직한 연구서들을 내놓았고 1936년에는 그토록 소망하던 소르본대 경제사 교수에 취임했다.

전운이 감돌던 1939년, 53세의 이 역사학 교수는 연구실을 박차고 다시 자원입대해 대위로 임관됐다. 하지만 이듬해 믿었던 마지노선이 어이없이 뚫려 독일군에 점령당하자 런던으로 철수한 다음 제대, 귀국했다.

친나치 괴뢰정권인 비시정부가 시행한 유대인 배척법에 따라 교단에서 쫓겨나자 그는 이번에는 프랑스 남부로 가 1943년 이후 의용유격대에 참여해 레지스탕스 운동에 투신했다.

최근 완역 출간된 「이상한 패배-1940년의 증언」(까치. 김용자 옮김)은 그가 1940년 5월 독일과의 전투에서 프랑스가 어이없이 패한 뒤 그 해 6-9월 게레-푸제르의 시골에 은거하면서 남긴 참전기록이다.

이 증언집은 블로크 스스로를 소개하는 '증인소개', 패전에 대한 사령부의 무능을 질타한 '피정복자의 진술' 및 강력하고도 통합적인 프랑스 재건에 대한 열망을 표출한 '한 프랑스인의 자성' 등 3부로 구성돼 있다.

증언집을 관통하는 블로크 사상의 핵심은 조국 프랑스에 대한 강렬한 사랑이다.

군사령부와 관리, 사용자와 노동조합, 교육제도, 공산당 등등에 대한 호된 비판은 결국 '위대한 조국' 프랑스 재건을 위한 열망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블로크 자신도 이 증언집에서 인용하고 있듯이, 1870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프로이센에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자 에르네스트 르낭이 프랑스 국민이고자 하는 자는 인종이나 언어를 불문하고 누구나 다 프랑스 국민이라면서 국민통합, 국가통합을 갈망했듯이 그 또한 패배한 조국 프랑스가 '하나되기'를 열망했다. 그는 말한다.

"나는 우리가 아직도 흘릴 피가 있기를 바란다" 304쪽. 1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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