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기념주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다. 1970년 해외홍보용으로 금화 6종, 은화 6종이 독일에서 제조돼 외국인들에게만 판매됐던 `대한민국 오천년 영광사 기념주화'가 최초로 기록되고 있지만, 이미 제조를 마친 상태에서 형식적으로 금융통화위원회의 의결을 거쳤다는 절차상의 문제로 인해 우리나라 최초의 기념주화로 보기는 곤란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처럼 `대한민국 오천년 영광사 기념주화'는 탄생 배경이나 제작과정에서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1970년 8월1일 한국은행 공고 내용에는 `한국은행법 제54조에 의거 정부의 승인과 금융통화운영위원회의 의결을 얻어 대한민국 반만년 역사를 기념하기 위하여'라고 그 발행 목적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당시 기념주화 발행 추진 사실은 비밀로 분류돼 구체적인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99년에서야 당시 국무총리 정부 비서관이었던 박승복 씨가 그 추진 배경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1969년 양유찬 대사가 주미대사를 그만두고 순회대사로 임명돼 유럽국가를 순회하던 중 북한에서 금·은주화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이를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기념주화인 `대한민국 오천년 영광사 기념주화'는 결국 북한보다 먼저 금·은 기념주화를 갖고 싶어한 대통령의 뜻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기념주화는 대부분의 국민들에게는 발행사실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대통령 특명에 의해 기념주화 발행 사실이 엄격히 비밀에 부쳐지고 기념주화 발행에 대한 정부 승인과 금융통화운영위원회의 의결 절차가 발행 후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기념주화의 제조는 독일의 주화 제조업체가 맡고 판매는 당시 세계적인 화폐 판매망을 갖고 있던 이탈리아 이탈캄비오 회사가 대행했다. 더욱이 이탈캄비오 회사가 판매 대금의 20%를 한국 정부에 지급한다는 조건으로 해외에서만 판매하는 것으로 발행 방식이 결정돼 국내에서는 기념주화를 구경할 기회도 갖지 못했다.

당시 발행된 기념주화는 금화 6종(2만5천 원, 2만 원, 1만 원, 5천 원, 2천500원, 1천 원), 은화 6종(1천 원, 500원, 250원, 200원, 100원, 50원)이며 금화 6종과 은화 6종으로 구성된 세트는 국내에서는 매우 희귀해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화폐수집상에 따르면 12종 금·은화 세트의 시중거래 가격은 근래에는 3천만 원을 호가한다고 한다.

또 이 기념주화 발행을 준비하는 과정에는 화폐 도안의 정확성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도안 소재에 대한 실측 작업까지 벌였던 알려지지 않은 일화가 있다. 독일 제조업체가 은화 500원화의 소재인 석굴암 보살 입상 도안의 양쪽 흉부 높이가 다르다고 지적하면서 도안이 잘못된 것인지 실제가 그런지를 확인해 달라고 우리나라 관계자에게 요청을 해온 것이다. 이에 따라 당시 한국은행 및 정부관계자는 경주 석굴암을 직접 방문해 보살 입상의 양쪽 흉부 높이를 직접 실측까지 했다. 그 결과는 보살 입상 양쪽 흉부의 높이가 실제로 서로 다른 것으로 판명됐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절차를 밟아 발행된 최초의 기념주화는 무엇일까? 이로부터 5년후인 1975년 발행된 `광복 30주년 기념주화'이다. 해외에서만 발행돼 우리나라 국민들은 제대로 구경조차 못한 `대한민국 오천년 영광사 기념주화'의 아쉬움을 달래려는 듯이 이 기념주화는 액면 100원으로 500만 장이 발행돼 대부분의 일반인들도 하나쯤 소장하는 대중적인 인기를 모았다.


〈한국은행 인천본부 기획조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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