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이 스키를 탔다니  뜻밖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엄연한 사실이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2년 전 타계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재임 초기에 무려 100여 차례나 '몰래 스키'를 즐겼다.
   
틀에 박힌 생활을 반복하던 교황에게 스키는 꿀맛 같은  '탈출'이자   '외도'였던 것 같다. 교묘하게 경호대의 눈을 따돌리고 친구들과 함께 설원을  미끄러지며 해방감을 만끽한 뒤 다시 근엄한 모습으로 제대에 올랐다는 것이다.
   
교황이 몰래 탈출을 감행했다면, 한국의 한 스님은 당당하게 '일탈'을  즐긴다.종목은 스노보드. 경기도 양평 용문산 자락의 상원사 주지인 호산(42) 스님은  지난10여 년 간 스노보드의 매력에 빠져 있다. 고글을 쓰고 반원통의 하프파이프(Half Pipe)를 훨훨  날아다니며 '이색 해탈'을 맛보는 것이다.
   
호산 스님은 단순한 스노보드 동호인이나 예찬론자가 아니다. 수행생활  속에서 스노보드를 즐길 뿐 아니라 전국대회도 직접 주최하고 후진도 양성해 이 분야의 '큰스님' 구실을 하고 있다. 오는 6일 홍천 대명비발디파크에서 열리는  제5회  달마배 오픈 스노보드 챔피언십에는 내로라 하는 전국의 프로 보더들이 기량을 겨룬다.

   
올해 대회에는 200여 명이 참가하고, 스님도 몸소 시범을 보일 예정.  대회는   축제 분위기 속에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계속되며 인원이 많은 관계로  라이트를 켜놓고 진행된다. 가장 인기있는 스노보드 대회가 바로 이 달마배라고.
   
달마배 대회는 스님이 산중에서 잠시 나와 세속과 뒤섞이는  파격의  시간이다.

스님들이 두문불출하고 수행에 정진하는 동안거 기간이지만 잠시 가부좌를 풀고  스노보드에 오르는 것. 출전종목인 '스노보드의 꽃' 하프파이프는 고난도의  유연성이 요구돼 10대와 20대가 주로 타는데 40대로는 보기 드물게 스님이  보딩을  선보이곤 한다. 가사자락을 휘날리며 540도로 공중회전하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스님이 스노보드와 인연을 맺은 것은 10여 년 전이다. 남양주 봉선사에 있을 때 인근의 포천베어스타운에서 스키장 사고가 나 지신밟기를 하고 기도를 해준 것이 계기가 돼 스노보드를 만났다. 스키장 측은 감사의 표시로 스키를 탈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스키보다 스노보드에 깊이 빠져들었다.

   
스노보드를 타다 보니 프로보더들도 알게 됐다. 보드 장비는 두어 군데의  업체에서 '시주'를 해줘 해결한다. 프로보더들과는 가까운 도반이 돼 2003년부터 매년  달마배 챔피언십대회를 열게 됐다는 것. 그 사이에 스노보드 1세대인 이덕문(25) 프로를 비롯해 문희정 프로 등이 결혼할 때마다 주례로 나서기도 했다.
   
스노보드와 수행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언뜻 봐선 전혀 무관할 것 같지만 분별심을 버리고 다시 보면 다를 게 하나도 없다고 스님은 들려준다. 스노보드가 꽉  짜인 일상생활에서 해방되는 놀이라면, 수행 역시 야차같은 번뇌망상에서  벗어나는  구도법이라는 것이다.
   
구태여 다른 점을 찾아 스노보드가 동적이라면 수행은 정적이랄까. 하지만 크게봐 '역동적 고요함'으로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역시 같다는 게 스님의   지론이다. 어떤 틀에서 벗어나 해탈이라는 대자유를 찾아가는 게 바로 수행이 아니냐는 얘기다. 금강경에 나오는 '무유정법(無有正法)'처럼 아집을 버리고 나면 '진리란 본디 정해진 바가 없다'고 하겠다.
   
따라서 수행하는 마음으로 스노보드를 타면 그것으로 그만이라는 것. 임제 선사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ㆍ어느 곳에서든지 주인공이 되라. 서  있는 그 자리가 모두 진실하다)'이라고 말했듯이 어디에 있든 분별심을  떨치고  삶의주인이 된다면 행위가 무엇이냐는 것은 그저 부수적일 뿐이다.
   
국내 스노보더 제1호 스님이지만 요새는 이전처럼 자주 스노보드를 타지 않는다.달마배 대회 때와 초등생 대상의 '달마아카데미'에서 타보는 게  전부다.  도반  스님들에게 적극 권하는 것도 아니다. 인연 따라 배우면 그만이지 '그게    좋더라'며 강권하는 것 또한 분별심을 낳는 일이기 때문이다.
   
중학 1학년 때 출가한 스님은 양산 통도사 승가대학을 나와 약간 특이한 선  수행의 길을 걷고 있다. 캐나다에 원정 보딩을 갔을 때 '보드 탈 때 무슨 생각을 하느냐'는 입국심사관의 질문에 "나는 보드를 타도 탄 바가 없다. 욕심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어서 타도 타는 바가 아니다"라며 공(空) 사상으로 대답했다는 일화가 재미있다.

   
스님은 또 말한다. "정말 잘 타는 보더들은 안다. 혼자 잘 나서는 실력이  늘지않는다. 따로 노는 것 같아도 고수들은 함께 '떼보딩'을 하며  서로를  향상시킨다.스님들의 동안거와 하안거도 마찬가지다. 따로 한 마디도 나누지 않지만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큰 가르침을 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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