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청룡 바우덕이 /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용 바우덕이 /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오다.

안성 청용 바우덕이 / 줄 위에 오르니 돈 쏜아진다.

안성 청용 바우덕이 / 바람을 날리며 떠나를 가네.
이 노래는 안성남사당 패가 전성기 때 팔도강산을 유람하며 바우덕이 패가 노는 것을 본 서민들이 그노름에 도취 된 남머지 장단에 맞춰 부른 노래다.

◇남사당

남사당이란 조선 후기에 장터와 마을을 떠돌아 다니며 곡예·춤·노래를 공연했던 집단으로 전문 공연예술가들로 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연예집단이다.

발생시기는 조선 숙종(1661~1720) 때이며, 남사당패가 시작된 곳이자 전국 남사당패의 중심이 되었던 곳은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의 불당골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남사당은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40~50여 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단체의 우두머리를 꼭두쇠라고 불렀다. 그 밑에는 곰뱅이쇠, 뜬쇠, 가열, 삐리, 나귀쇠, 저승패 등으로 직책을 나누었다.

구성원은 자발적으로 들어온 경우도 있지만 생활이 곤궁한 집에서 아이를 맡긴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남사당패에서 아이들을 훔쳐오기까지 했다.

꼭두쇠를 중심으로 공연 내용을 정해 기예를 연마했고 전국의 장터와 마을을 다니면서 풍물놀이, 줄타기, 탈놀음, 창(노래), 인형극, 곡예(서커스) 등을 공연했다.

이들은 노비보다도 더 천한 신분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떠돌아 다니면서 근근히 끼니를 때우는 어려운 생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그래서 예쁜 사내아이들과 여자들의 몸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겪다가 19세기 말에 여자로서 15세의 어린 나이지만 기예가 매우 출중했던 바우덕이가 안성 남사당패의 대표인 꼭두쇠가 되면서 남사당을 최고의 민중 공연예술단으로 승화시키기에 이른다.

당시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고 있었는데 '바우덕이'의 안성 남사당패가 신명나는 공연으로 노역자들을 기쁘게 해 경복궁 중건사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흥선 대원군은 노비보다도 천한 남사당패에게 당상관 정3품(지금의 도지사급)의 벼슬에 해당하는 옥관자를 수여했다.

이렇게 해서 조선왕조로부터도 지위를 인정 받은 남사당패는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민중예술단으로 활동하게 되지만, 이후 일제의 침략과 민족문화 말살정책으로 해체와 결성을 반복하면서 그 명맥마저 끊길 뻔한 시련을 겪게 된다.

   
 
   
 
그러나 바우덕이 이후에도 남사당의 근거지이자 생활터전이었던 안성에서 남사당의 후예들이 안성과 서울을 중심으로 남사당의 전통을 끈질기게 이어오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남사당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게 되었다.

 
이에 지난 2001년도부터 해마다 조선 최초이자 최후의 여자 꼭두쇠 바우덕이를 기리고 남사당 문화를 세계적인 한국 대표문화로 전승 발전시키고자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축제'를 개최해 오고 있는 것이다.

 
◇남사당패 활동 영역
 
남사당패는 전국을 떠돌며 공연으로 벌어서 먹고 살던 집단이다. 따라서 전국 어디에서나 공연을 펼쳤으며 조선시대 후기에는 아주 많은 남사당패가 있었다.

 
이들은 조선후기 장터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추수를 끝낸 마을을 찾아가서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장소가 아니더라도 불러주거나 남사당패가 끼니를 채우기 위해 공연을 할 수 있는 곳을 수소문하고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남사당패들도 겨울이면 너무 추워 공연이 어렵고 또 여름 장마철이면 비 때문에 공연을 하지 못했으므로 이러한 시기에는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불당골과 같은 자신들의 근거지에 돌아가 먹고 자고 했다.

 

   
 
   
 
조선시대 후기 남사당패는 노비보다도 천한 신분으로 대우 받았다. 그러므로 40명 이상이 되는 남사당패가 공연을 하기 위해 마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공연을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야 했다. 물론 이러한 허락은 공연장소는 어디로 하고 또 공연의 대가로 식량과 잠자리를 제공한다는 약속을 받았다.

 
남사당패에서 공연허락을 받기 위한 협상 업무를 전담하는 직책이 있었는데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을 '곰뱅이쇠'라고 불렀다. 곰뱅이쇠의 협상능력에 따라 남사당패의 생계가 좌우되므로 곰뱅이쇠는 경험이 풍부하고 책임감 있는 나이든 사람이 담당했다.

 
마을 입구에 도착하면 남사당패는 마을 어귀에서 마을의 책임자 또는 마을의 유지를 찾아간 곰뱅이쇠가 공연 승락을 받아오기를 기다린다. 곰뱅이쇠가 마을 유지에게서 승락을 받았을 경우에는 남사당패에게 멀리서 “곰뱅이 텄다”하고 소식을 전해준다. 그러면 기다리던 남사당패는 신이 나서 “곰뱅이 터졌다”하면서 풍물을 울리며 마을로 들어가게 된다.

 

   
 
   
 
◇남사당패의 기여
 
남사당은 조선 후기에 지배계층에 억눌려 살던 백성들의 불만사항을 해학과 비판이 넘치는 공연을 통해 토로, 세상에 널리 알리고 이를 통해 사회 변화를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사회개혁을 하다가 쫓기는 신세가 된 사람들을 관대히 남사당패에 가입시켜 주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어 가졌으며 전국의 장터를 떠돌며 사회부조리를 알리고 일깨우는 혁신 활동을 수행했다.

 
◇바우덕이는 누구
 
바우덕이'는 조선시대 후기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여자로서 남사당패의 우두머리인 '꼭두쇠'가 되어 남사당패를 이끌던 사람이다.

 
1848년 안성의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1853년 5세의 어린 나이에 안성 남사당패에 맡겨져서 노래, 줄타기, 악기연주, 살판 등 갖가지 기예를 익혔다.

 
바우덕이는 어려서부터 줄타기, 살판, 노래, 풍물놀이 등 남사당놀이의 모든 기예에 남다른 소질을 발휘해 남사당패와 함께 공연을 나가면 관람객에게서 폭발적인 인기를 받았다고 한다. 안성 남사당패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고 벌어들이는 수익도 늘어나는 등 남사당패 내부에서도 바우덕이의 존재가치는 더욱 커졌다.

 
바우덕이가 15세가 되었을 때 안성 남사당패를 이끌던 꼭두쇠가 연로해 새로운 꼭두쇠를 선출하게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어린 바우덕이가 모든 단원들의 만장일치로 꼭두쇠로 선출되었다.

 
당시로서는 나이가 15세밖에 안 됐고 더군다나 여자의 신분으로 남사당패의 꼭두쇠가 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바우덕이의 뛰어난 예술적 소질과 공연장에서의 스타성을 인정한 결과였다.

 
이후 바우덕이가 이끄는 안성 남사당패는 전국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고종 2년(1865년) 흥선 대원군이 안성 남사당패를 불러들여 경복궁 중건사업에 지친 노역자들을 위로했는데 최고의 공연을 펼쳐 노역자들을 기쁘게 해 주었고 흥선 대원군은 감사의 표시로 당상관 정3품의 벼슬에 해당하는 옥관자를 수여했다.

 
이때부터 안성 남사당패는 전국 남사당패와 모든 놀이패의 최고 우두머리 단체로 활동했으며, “바우덕이패가 왔다. 바우덕이다”와 같이 '바우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때부터 대한민국 연예가 발생한 시점으로 보고 있으며 대한민국 최초의 연예인을 그래서 '바우덕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바우덕이는 이후로도 전국을 다니며 남사당이라는 천한 놀이문화를 대중공연문화로 발전시켜 백성들을 억눌린 한을 풀어내리고 위로하는 활동을 지속하다가 힘든 유랑 생활 속에서 폐병을 얻게 되고 1870년 23세의 어린 나이에 숨을 거두게 된다.

 
남사당패가 바우덕이의 주검을 수습해 장례를 지냈으며, 현재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에 바우덕이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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