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이나 지금이나 '글쟁이'라면  묘지명이라든가 책 서문처럼 남들이 청탁해서 쓰는 글은 모름지기 피하려 했다. 한데 이처럼  귀찮고 내키지 않는 글에서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펼치며 그것을 주옥 같은 예술로 승화한 인물이 있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 23살된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가 문집 '초정집'(楚亭集)을 내면서 그 서문을 써 달라고 하자 연암은  거기에서 이런 말을 한다.

   
"아! 소위 '법고'(法古)한다는 사람은 옛 자취에만 얽매임이 병통이요, '창신'(창<井+刃>新=創新)한다는 사람은 상도(常道)에서 벗어나곤 하는 게 걱정거리다.  진실로 법고할 줄 알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창신하면서도 능히 전아(典雅)하다면 요즘의 글이 바로 옛 글이다."
   
연암은 그다지 시는 즐기지 않았다. 그는 산문의 귀재였다. 초정집 서문에서 주장한 법고창신을 시종 시험하려 했다. 괴짜 민노인, 한양 거지 광문(廣文)을 과감히문학소재로 발탁, 데뷔케 하는가 하면, 똥 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선생'이라  추숭했다.

   
김명호(金明昊. 54)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에게 연암은 마르지  않는  샘이요, 평생 화두다.
   
우직할 정도로 연암이라는 한 우물만 파는 그는 주변 많은  한문학도가  문화사 전반으로 관심 영역을 확대해 가지만, 오직 박연암(朴燕巖)에만 매진한다. 
   
요즘은 박규수(朴珪壽. 1807-1877)에 뛰어들었으나, 그 역시  연암의  손자이니 연암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나중에 단행본으로 정리된 박사학위  논문이 '열하일기 연구'요, 그 외 다른 단행본도 제목이 '박지원 문학연구'다.
   
고전 국역전문기관인 민족문화추진회(민추)에서 지금껏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연암집'(燕巖集) 완역을 의뢰하자, 김 교수는 안식년 1년을 통째로 이 작업에만 매달렸다. 이를 포함해 2년만에 '국역 연암집'은 사거 200주기에 맞춰 2005년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김 교수는 1년을 더 연암집 정리에 쏟았다. 도서출판 돌배개가 민추와  판권계약을 하고 연암집 국역서를 재편집해 출간하기로 함에 따라, 새로운 판형에  맞는 수정작업을 벌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 교수는 '국역 연암집'에서 발견된 "번역이나  인쇄상의  오류를 바로잡는 한편, '한문문집총간' 표점본(標點本)에 의거한 원문  구두(句讀)를  전면 교열하여 완역을 기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돌베개에서 전집 3권으로 최근 재정리돼 선보인 '연암집'은 나아가 번역과 각주를 수정 보완했으며 새로운 이본들을 추가 대조해 원문교감에 반영했다. 김 교수는 그 결과 "각주와 원문 각주를 합해 약 4천개에 달하는 주석이 붙게 되었다"고  말한다. (전질 7만5천원)
   
민추본 '국역 연암집'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연암집 판본을 생산한 셈이다. 
   
김 교수는 또한 이참에 연암문학을 대표하는 글들을 추려 뽑은 선집을 '지금 조선의 시를 쓰다'라는 제목으로 같은 출판사에서 별도 출간했다. 이 선집에는 소설 10편, 산문 75편, 시 15수의 도합 100편을 수록했다.

   
김 교수는 이 선집이 1960년 북한에서 나온 홍기문(洪起文. 홍명희 아들)의 '박지원 작품선집'이 이룩한 성과를 "진정으로 극복하리라 다짐하던 결심을 옮긴 것"이라고 말했다. (554쪽. 1만8천원)
   
김 교수에게 연암 외에도 우전(雨田) 신호열(申鎬烈)이란 그림자가 항상 어른거린다. 이미 고인이 된 저명한 한문학자이자 고전국역가인 우전에게 그는 한문을  사사했으며, 특히 20여 년 전에는 그가 개설한 연암집 강독을 수강했다. 
   
민추본 '국역 연암집'과 마찬가지로, 이번 돌베개본 '연암집'에도 김 교수가 옮긴이로 우전을 굳이 앞세운 까닭은 우전이 당시 강독회에서 구술한 국역문을 토대로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 교수는 박지원 문학이 "탈근대를 외치고 세계화를 지향하는  현대에도  전혀 낡지 않았다"면서 "연암은 당시 양반들의 고루한 사상과 복고적인 문풍을  혁신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시대적 편견에서 벗어나 사물을 늘 새롭게 인식할 것을  촉구한 점이 연암 문학이 오늘날에도 살아있는 고전으로 빛을 잃지 않는 비밀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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