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도교회 로고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인천에는 화도동(花島洞)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곳에는 지형이 곶(串)으로 이뤄져 마치 섬처럼 보이므로 `곶섬'이라 부르다가 `꽃섬'이 되고 한자로 `花島'가 됐다 한다. 1907년 이 마을에 교회가 세워졌다. 지금의 화도교회(담임목사 홍기만)가 바로 그 교회다.

 # 화도교회 설립과 시대적 배경

 19세기 말 그때만 해도 서양의 외항선들은 인천항구에 들어올 수 없어 인천 앞바다에 정박하고 작은 연락선이 승객을 태우고 제물포 포구에 들어왔다.
 일본주재 선교사 매클레이 박사가 1884년 6월 24일 선교사로는 최초로 인천을 경유해 서울로 들어가 국왕에게서 교육과 의료사업의 윤허를 받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후 일본에 도착한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가 제물포항에 상륙, 한국의 전도인 한 사람을 데리고 인천선교를 하게 했다. 그 사람이 노병일이라는 한국인이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인천 체류와 그 후의 서울 입경 과정 속에서 설립된 것이 제물포 위슬리교회(인천내리교회 옛 교회명)이다. 그 후 1907년 화도교회가 화도기도처란 이름으로 설립됐다.
 당시 화도기도처(화도교회의 전신), 내리교회는 교인들로 차고 넘쳐 더 이상 교인들을 받아들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로 인해 주일집회만은 내리교회 신자들이 많이 모여 사는 지금의 동구 화수동인 화도와 지금의 동구 창영동인 우각리에 각각 기도처를 설립해 교인들을 분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도에 세운 기도처는 인천의 우상숭배의 제1번지인 관왕묘터였다고 화도교회 설립 당시 공식적인 기록에 남아 있다.
 화도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했던 박이섭 목사는 그의 저서 `화도교회 이야기'를 통해 인천시장(당시 부윤)이 시민의 미신 타파와 무상아동교육을 위해 우상의 본부인 관왕묘를 내리교회와 합해 매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이 집 주인은 예수를 믿게 돼 집을 팔려고 내 놓았다고 했다.

 # 부흥회와 선교 봉사 활동

   
 
 화도교회에서 부활절 헌금이 기록한 감리회보에 기사화되기도 했다. 1935년도 부활절에 인천지방 화도교회 1원과 신화수리교회 이름으로 2원 각각 헌금했다라고 돼 있다. 화도교회를 신화수리교회라고도 불렀는데 신화수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촌리, 화도동, 수유리를 병합해 세 마을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이름으로 알려졌다.
 1937년 당시 화도교회에는 서울 박창현 목사를 초빙해 부흥회를 개최했는데 밤마다 130여 명씩 출석하고 새 신자는 16인이나 됐으며 `교우 이모 씨는 1년이나 병으로 신음하다가 주의 은혜로 쾌차함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기 위해 예배당에 21원 가치의 헌금을 기부했다'라고 당시 감리회보에 기록돼 있다.
 1930년 영화여자보통학교 오파더 교장은 꽃섬 유치원을 영화여자보통학교 부속 유치원으로 설립, 어린이들의 천진한 성품을 기독교주의 사상에서 보호·육성하는 데 주력했다.
 1932년 4~12월까지 8개월간의 인천지방회 통계자료에 따르면 화도주일학교는 그 급수가 1종 주일학교로 총 재적 수 476명, 평상시 출석학생 수는 339명으로 나타나 화도, 신도구역 주일학교의 당시 교세를 짐작해 주고 있다.

 # 폐쇄와 재건의 역경

   
 
 화도교회는 일제말기 일제에 의해 폐쇄돼 모교회인 내리교회와 합병했다가 해방되자 다시 현재 위치에 재건됐다. 제2차 세계대전의 말기 궁지에 몰린 일본의 패배가 확실한 때 인천에서도 교회의 종을 떼어내어 헌납하도록 강요했고 이에 협조하지 않는 교회는 문을 닫아버리는 시대를 맞아 화도교회는 규모면에서는 보잘 것 없지만 강문호 목사를 중심으로 열심히 교인들이 모이는 교회였으나 일제가 강제적·물리적으로 폐쇄시켜 결국 눈물을 머금고 문을 닫아야 했다. 이때 몇몇 교인들은 먼발치로 교회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후 해방이 되자 요란한 종소리처럼 화도교회 재건의 작업이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부인회로부터 벽돌 연보라를 명칭하고 매 주일 15전으로 최하 5전까지 1년간 수입된 것이 100원으로 1946년 답동에서 이세언 목사 중심의 화도재건교회를 시작(후에 중앙교회로 개칭)한 데 이어 남궁관 목사 중심으로 옛 화도지역에 화도교회(동구 화수동 281번지 9천917.4㎡) 2층을 건립, 점차 증축해 오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 대내·외적인 사회봉사활동

 예배 시에는 1일교사 등 자녀들과 친밀하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행사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사회봉사부는 남·여선교회와 협력해 주 안에서 부모를 존중하고 공경하라는 믿음을 가지고 화도교회 노부모들과 교회 주변의 노인들을 초청, 정성을 다해 위로의 경로잔치를 베풀어주고 있다. 그리고, 교우사랑과 장학사업, 경조사업, 지역 주민 돕기, 원로원 방문 등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자연환경 보호와 생명운동 전개에 나서 환경에 중요성에 대한 교육을 실시, 물자절약운동과 자선바자회로 주변의 주민들과 친밀한 만남을 계기로 교회 주변 청소를 특별히 신경 쓰고 과소비 안 하기, 유해음식 안 먹기 등을 항상 전개하고 있다.
 
 # 100주년을 맞아 새롭게 출발 - 빛을 들고 세상으로

   
 
 화도교회의 100주년을 맞아 `어게인(again) 2007' 슬로건의 의미는 색다르다.
 화도교회가 선교의 1세기를 마감함과 동시에 새로운 1세기를 맞이하는 단계로, 다시 일어나는(again) 2007로 그 의미를 새기고 있다.
 홍기만 목사와 화도교회는 오는 14일 100주년 기념을 준비하기 위해 지난 2000년(그리도스의 제자가 되고), 2002년(생명을 구원하며), 2003년(기도로 승리하고), 2004년(섬김에 본이 되며), 2005년(온전한 주님의 청지기가 되는), 2006년을 100주년 기념 준비 해로 본격적인 사업을 위해 올 기념사업 중 제일 먼저 `화도교회백년사'를 편찬했다.
 이제 `기독교 대한감리회 화도교회'는 100주년과 더불어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어게인(again) 2007'를 맞아 모여 예배하고 성전에 나아가 기쁨으로 예배드리며, 말씀과 찬양이 넘치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고,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곳으로 우뚝 섰다.
 아울러 예배의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의 몸, 즉 부활하신 주님의 영적인 몸으로서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는 공동체를 지향할 것을 교인들은 한결같이 염원하고 있다.
     

     

        <홍기만 담임목사 인터뷰>

 

   
 
“올해는 지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100년이 되는 해이면서 화도감리교회가 10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합니다. 지난 1995년 제22대 담임목사로 부임해 올 교회 창립 100주년을 맞게 돼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100주년 역사의 자리에 함께하게 된 것을 무한한 기쁨으로 여기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화도교회 100주년을 맞은 홍기만 목사의 남다른 감회다.

 홍 목사는 “오늘의 이 시간이 있기까지는 지난 세월 동안 교회의 부흥을 위해 눈물을 뿌려 기도하고 금식하며, 헌신을 다해 온 선배 목사님들과 선배 신앙인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며 그들에 노고에 감사를 표했다.

 이어 “이제 100주년을 맞은 화도교회는 새롭게 출발하는 교회라는 표어를 내걸고 새로운 세기에 다가올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교회의 부흥과 성장의 모습을 가슴에 그려본다”고 말했다.

 또한 “불우이웃 쌀 전달과 장학금 전달, 주변 봉사단체들과 연계한 연탄 배달 등 지금까지 이어온 다양한 활동을 통해 지역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 감당을 꾸준히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화도교회는 말씀이 살아 있고, 예배가 생동력 있고,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예수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한 선교의 3가지 관점에 포인트를 맞춰 새로운 100년을 맞이하려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특히, 홍 목사는 “살아 있는 예배와 말씀 중심의 삶을 통해 오직 성서에 근거한 교육과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국내선교는 물론, 해외선교사들을 지원하는 데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등 새로운 한 세기를 맞이하는 화도교회는 분명 무한한 가능성과 자원을 가진 교회로 제2의 부흥기를 맞이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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