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말숙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인천지부 원장

 지금까지 부모님 두 분이 건강하시고 가족 중에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세상을 떠난 사람이 없는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혼이나 재혼, 가족의 죽음 등은 내게는 일어나지 않는 남의 일이었다. 자라면서는 그런 것은 소설에나 있는 일인 줄 알았다. 행복한(?) 어린 시절이었을까? 결혼 후 몇 달 뒤부터 약국을 경영했는데, 매일같이 아프고 다친 사람이 와서 하는 하소연을 들으면서 조금씩 주변의 아픈 사연에 눈을 뜨게 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프고, 때론 화가 나기도 하고, 같이 애통해 하는 소설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돼 갔다. 일방적인 남편의 변심으로 이혼 당한 친구, 한 부모 가정의 아이들 친구, 매 맞는 아내 혹은 남편, 외도를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남편 혹은 아내, 폭력을 휘두르고 자녀를 학대하는 가장, 자기를 낳아 주신 부모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자식들이 주변이 생겨났다. 그래서 삶이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는 것을 알게 됐다. 소설은 틀에 갇힌 액자로 희노애락 속에 여운을 남기며 다시금 인간의 본성을 뒤돌아보게 하지만 삶은 그 보다 더 치열하고 되돌림이 없는 현실로 내가 당당히 섰을 때만이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대한 가정법률복지상담원 인천지부에는 내가 생각했던 인생보다 더 답답하고 억울하고 눈물나는 속 터지는 삶의 현장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읽을 줄 모르고 쓸 줄 몰라서, 때론 힘이 없거나 어려서, 돈이 없거나 알지 못해 일어났다. 그래서 내담자 대부분이 사회적으로 약자인 여성이거나 노인 또는 아동이나 장애우들이다. 간혹 매 맞는 남성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왜 그렇게 하나같이 내담자의 남편들은 술만 마시면 아이들과 부인을 폭행하고 폭언하고 살림을 때려 부수는지 화가 나서 속이 터질 것 같다. 의처증으로 부인을 감금하고 위협하고, 외도를 당연시하고... 이런 남편들을 잡아 가두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한발짝 떨어져 들어주고 법적인 내용을 알려주고 법적인 절차를 밟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우리 상담원의 역할이다. 대부분의 이런 여성 내담자와 달리 상담원에는 법을 몰라 억울한 일을 당하고 속 끓이다가 오는 경우가 있다. 이런 모르는 게 죄(?)인 상황에서 아는 것이 힘인 상황으로 바꾸는 일 또한 상담원의 역할이다.

작년 2월에 내담한 할아버지의 경우는 머리 속을 떠나지가 않았다. 할아버지의 나이는 93세로 갈수록 아내의 폭력은 더해 가고, 그 비위를 맞추며 사는 것도 지긋지긋하고, 이젠 감시까지 해서 어디를 가든 쫒아 다니고 나가지도 못하게 해 도저히 더 이상은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연세도 많았고 다짜고짜 이혼을 하신다는 것 같아서 일단은 말려보았지만 할아버지의 태도는 완강했다. 안 그래도 얼마나 살 수 있다고 이혼을 하냐 싶어 병원엘 가서 얼마나 살 수 있는지 물어보았더니 최소한 5년은 더 살 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연세에 비해 매우 정정했고, 청력이나 기억력도 문제가 없어 보였으며, 말을 이해하는 것도 글을 쓰시는 것도 문제가 없었다. 단 하루를 살아도 맘 편하게 살고 싶다, 이렇게 50년을 살았는데 앞으로 남은 5년은 너무 길다는 할아버지가 안타까웠다. 후에 할머니를 모셔서 조정을 해 일단은 할아버지가 이혼을 안 하는 것으로 마무리했지만 대부분의 가정폭력으로 고통 받는 여성내담자들이 와서 하는 말인, ‘사람답게 살고 싶다. 단 하루라도 눈치 안보고 맘 편히 살아보고 싶다’는 90이 넘은 할아버지의 외침은 오랫동안 가슴을 울려 나가질 않았다.
사실, 행복은 순간이다. 매 순간 행복하다면 그냥 무미건조한 일상일 뿐일 것이다. 순간순간의 작은 기쁨이 쌓여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사람답게, 맘 편한 일상이 모여 행복한 삶을 만든다. 대부분의 내담자들이 꿈꾸는 것도 삶이 고달파도 한순간 사랑으로 배려 받고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하는 남편, 아내, 어머니, 아버지, 이웃일 게다. 읽을 줄 모르고 쓸 줄 몰라서, 때론 힘이 없거나 어려서, 돈이 없거나 법을 알지 못해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호소할 곳조차 없는 사람들이 있어 삶이 더 고통스러워서는 안 된다. 소설에나 나올 법한 드라마틱한 일은 소설에만 존재하는, 우리 상담원이 함께하는 작지만 소박하고 평범하고 그리고 상식이 통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어 본다.

약력
수성당 약국 대표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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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아동보호전문기관 사례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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