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영국군의 폭격으로 처참하게 부숴지는 이라크의 모습이 연일 TV화면에서 비춰지고 있다. TV를 지켜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착잡한 심정일 것이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벌어진 전쟁에 의해 어이없이 희생되는 무고한 생명을 생각하면 안타깝다. 그런 참상을 보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낌과 동시에, 힘이 지배하는 냉혹한 현실을 깨닫고 착잡해진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현재 TV에 비춰지는 전쟁의 참혹함은 결코 우리에게 `남'의 일일 수 없기 때문에 착잡함은 더욱 심하다. 힘을 가진 자의 오만에 의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러나 전쟁의 참상보다도, 남의 일이 아닌 우리 일일 수도 있다는 절박감보다도, 더욱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서둘러 미국을 지원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우리 정부이다. UN의 동의도 얻지 못한 미국만의 전쟁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내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 현실을 확연하게 깨닫게 해주는 증거를 보는 것 같기에 비참하다. 아마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는 대신 북한문제에 대한 모종의 약속을 받았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 대통령이 설명한대로 우리의 국익을 생각하여 미국에 대한 지지성명과 국군의 파병 결정을 내렸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렇게 허약한 우리의 현실이 비참하다.
 
우리의 안보와 우리의 생명이 소중한 만큼 이라크 국민의 생명도 소중하다. 생명은 누구의 것이든 소중하고 고귀한 것이다. 그런 고귀한 생명을 필연적으로 희생시키는 것이 전쟁이다. 정부는 우리의 안위를 위해 이라크 국민을 희생시키는 전쟁에 동참한 것이다. 과연 이것이 정당화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대통령의 결단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정부가 지지하건 안하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기정사실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우리나라의 안위라도 보장받자는 충정을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받게 될 양심의 가책은 어찌하는가? 나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일에 동참한 죄책감을 어떻게 씻을 수 있을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대다수의 국민이 전쟁에 반대한다는 반전여론이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반전시위는 이 땅에 양심이 살아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쟁에 반대한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용기 있는 성명도 있었다.
 
국익과 양심, 물론 쉽지 않은 딜레마이다. 국가의 안보와 국민을 보호하는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정부로서는 미국 지지성명과 파병결정이 최선일 수도 있으며, 또한 정부의 의무 최선을 다해 수행한 결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국익을 우선시한 정책적인 판단이라 하더라도, 전쟁을 반대하는 대다수 국민들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길 것이다.
 
힘의 논리와 우리의 안보만을 생각하는 근시안적 태도는 궁극적으로 이득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유사한 일이 한반도에 발생하였을 때, 지금 우리가 선택한 똑같은 논리를 내세워 다른 국가들이 전쟁을 지지하고 파병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정도를 걷는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 확신한다. 억지와 힘의 논리가 아닌, 상식과 이성이 지배하는 세계질서가 확고하게 자리 잡을 때, 우리의 안보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파병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명분 없는 이번 전쟁에 대해 확고하고 단호한 태도로 당당하게 임하는 것이 종국에는 우리의 안보를 보장받는 지름길이 아닐까?
 
21세기 벽두에, 야만을 벗어나 문명이라 스스로 자부하는 시대에, 이런 야만스러운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할 따름이다. 목표물을 2m 이내의 오차로 폭격하는 정밀한 무기를 만드는 `기술'은 갖추었을지 모르지만, 야만스런 전쟁이 자행되는 시대는 분명 `문명'의 시대는 아니다. 정말로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려면,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를 `문명인'이라 자부할 수 있게 되려면 도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이 더 흘러야 하는 것일까?

전영우 인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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