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왕】의왕시 청계사(주지 성행스님)와 경기문화재단(대표이사 권영빈)은 지난 5월 22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35호인 청계사 경판을 전통 방식으로 인쇄하고 경내 대웅전에서 인출본(印出本)에 대한 봉헌식을 가졌다.
불교 기록문화재의 원본자료 연구 활성화를 위해 마련된 인출본은 묘법연화경 213판을 비롯해 강원교과목(선요, 도서, 절요, 서장), 불교의식 문헌(예수시왕생칠경, 오대진언, 법계성범수륙승회수재의궤) 등 모두 466판을 전통 방식으로 경판 세척과 인쇄 및 제본 과정을 거쳐 봉헌식을 가졌으며, 청계사 불교경판은 조선시대 인쇄 및 불교문화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는 역사적으로 소중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청계사 경판은 평균 가로 50㎝×세로 21㎝ 규격으로 양면에 각자(刻字)돼 있으며, 인출을 위해 국산 닥나무로 만든 최고급 전주한지 4만 매(가로 60㎝×세로 50㎝)와 먹물 60㎏이 소모되고, 경판 세척을 위해 천일염 40㎏이 사용됐으며, 1단계로 경판 세정(맑은 물 18L에 천일염을 희석해 염분농도를 조정하고 경판을 세척(먼지, 곰팡이 제거)), 음지에서 자연건조(경판의 비틀림 방지)한 뒤 2단계로 경판 인출(먹을 경판에 묻히고 한지를 붙임, 마력으로 한지를 적당하게 문지르고 한지를 떼어냄), 3단계로 경판 관리(먹물을 제거하지 않고 음지에서 자연건조)하고 전통 제책 방식(능화판 표지 및 5공 묶음)을 택했다.
▶인출=인경(印經)으로 별칭 먹을 목판을 칠해 손잡이를 잡고 한지에 차례로 찍어내는 과정으로 먹물의 농담과 칠하는 양을 판단해야 하며, 매우 정교하고 세밀한 작업 과정이 요구된다.(인출본은 반으로 접혀서 제책) 금석문의 탁본(拓本)과는 기술적 바탕이 다르다.
▶인경=목판을 종이에 인쇄해 책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처음에는 경전의 내용을 배우기 위해 스님들이 직접 손으로 필사하는 사경을 통해 책을 만들었는데 목판인쇄술이 발달하면서 활성화됐다. 인경에 쓰이는 다양한 재료와 도구의 준비를 시작으로 경판을 판전에서 내려오기, 종이 재단하기, 경판을 소금물로 깨끗이 닦아내기, 인경작업, 인경본 교정, 제본(가제본), 2차 교정, 제책, 제목 붙이기의 과정을 통해 책이 완성된다.
   
 
▶인출에 사용되는 재료 및 도구=한지, 먹, 마력, 경판 받침대, 솔, 먹판 등 다양한 재료와 도구들이 쓰인다. 최대한 전통 방식대로 인경을 하기 위해 경기문화재단과 청계사는 재료와 도구의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재료의 질에 따라 인출의 성패가 좌우되고, 경전의 수명과 질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한지=변색되지 않으며, 잘 찢어지지 않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닥나무를 가지고 전통 기법으로 만든 한지가 우리 민족 의상처럼 강인하고 부드러우며 깨끗할 뿐 아니라 종이의 질이나 보존 능력 면에서 탁월하다. 한지의 제작 과정을 확인하고 검토해 전주한지를 선택했다.

▶먹=예부터 먹의 빛은 천 년을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먹은 그을음으로 만드는데 들기름, 참기름, 소나무를 태워서 만들었으며, 최근에는 석유, 휘발유, 등유 등으로 만들기도 한다. 가장 좋은 먹은 참기름으로 만드는 것인데, 고가의 비용으로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있고, 이번 인경작업의 먹은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으로 만든 송연묵을 이용해 만든 먹을 사용했다.

   
 

▶마력=마력은 먹을 묻힌 경판에 한지를 얹고 그 위를 골고루 문지를 때 사용하는 도구다. 목판의 글자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찍히기 위해서는 제대로 잘 만들어진 마력을 이용해야 한다. 마력은 사람의 깨끗한 머리카락으로 만드는데,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풀은 뒤 30℃의 물에 넣어 어느 정도 주물러준다. 이렇게 물에 푼 머리카락을 뭉쳐서 3일간 햇볕에 말린 후 하나하나 실로 꿴 후 밀랍을 묻혀 만든다. 하루종일 인출을 할 경우 마력은 20일 정도 사용할 수 있다.

▶인출 담당=인출은 우리나라 최고의 탁본 기술자인 진한용(49·고려금석원)원장이 담당했다. 진 원장은 한국 탁본의 정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목판 인출은 해인사 대장경판 인정자로 유명한 변영재 선생에게 사사했다.

   
 
▶청계사 역사=의왕시 청계동(청계산)에 있는 전통 사찰로 통일신라 때 창건됐고, 1284년(고려 충렬왕 10) 평양부원군 조인규가 사재를 들여 중창했으며, 이후 조인규 가문의 원찰로서 약 500년간 중창을 거듭했다. 조선 연산군 때 도성 안의 사찰을 폐하고 관청을 세우자 불교계에서 이 절을 선종의 본산으로 정한 바 있으며,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이색·변계량 등 당대 문인들이 즐겨 찾으며 절을 주제로 시를 지었으며, 조윤·정송산 등은 이곳에서 출가하거나 칩거한 유서깊은 대한불교 조계종 사찰이다.

문화재로는 경기문화재자료 6호(3동의 요사와 10채의 건물), 국보 11-7호(동종, 1701년 주조, 높이 115㎝, 지름 71㎝ 조선후기 대표적인 범종), 경기유형문화재 135호(경판, 18종 466판)가 있으며, 2000년 10월 대법당에 보존된 세 분의 부처 중 맨 오른쪽 관세음보살의 왼쪽 눈썹 가에 핀 21송이의 우담바라로 유명한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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