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목 : 사적 제57호 
명칭 : 남한산성(南漢山城) 
면적 : 52만8천459.47㎡ 
지정일 : 1963.1.21
소재지 :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일원

본격적인 휴가철을 맞아 가족 또는 연인끼리 손쉽게 다녀올 수 있는 서울에서 1시간 거리에 위치한 남한산성의 현주소다. 남한산성과 함께 사적 및 경기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시설을 소개한다.

   
 

 # 남한산성
님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신라 문무왕 13년(673)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 ‘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돼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1624)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했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해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항복을 했다. 그 뒤 계속적인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시설은 동·서·남·북문루와 서장대·돈대·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남한산성 주변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남한산성은 각종 시설이 잘 정비돼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잘 된 곳으로 손꼽힌다.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3년(673)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晝長城, 일명 일장성(日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천360보로서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믿어져 내려온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 일장산성(日長山城)이라 기록돼 있으며, 둘레가 3천993보이고, 성내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고, 우물이 7개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또한 성내에 논과 밭이 124결(結)이나 됐다고 했다.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는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에게 축성할 것을 명해 2년 뒤에 둘레 6천297보, 여장(女墻) 1천897개, 옹성(甕城) 3개, 성랑(城廊) 115개, 문 4개, 암문 16개, 우물 80개, 샘 45개 등을 만들고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때의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사역했으며, 보호를 위해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됐다.

그 뒤 순조(純祖) 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돼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을 완비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처음 축성의 목적을 대변해 주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이 73칸 반의 규모이고, 하궐(下闕)이 154칸이나 됐다.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했는데, 이때 수어사인 이시백(李時白)은 서성을, 총융대장(摠戎大將) 이서(李曙)는 북성, 호위대장(扈衛大將) 구굉(具宏)은 남성, 도감대장(都監大將) 신경진(申景縝)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元斗杓)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해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三田渡受降檀)으로 나가 항복했으나, 그 뒤 계속적인 수축을 해 경영됐다.
▶남한산성행궁(사적 제480호.2007년 6월 8일 지정)=남한산성행궁은 정무시설은 물론 다른 행궁에 없는 종묘사직 위패 봉안 건물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조선시대 행궁제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또한 역사적으로 한 번도 함락되지 않은 대외 항전의 전적지로서 최고의 수준에 달하는 우리나라 성곽 축조기술을 보여주는 남한산성과 역사를 함께하고 있는 행궁은 1999년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해 상궐, 좌전이 복원됐으며, 일부 건물지에서 초대형 기와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된 중요한 유적이다.

   
 

남한산성행궁은 북한산성행궁, 화성행궁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행궁의 하나다. 남한산성은 후금(後金)의 침입을 막고자 1621년(광해군 13년) 백제시대 이후의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했는데 1625년(인조 3년) 행궁을 건립해 이듬해 완공했다.
‘문헌비고’에 따르면 당시 행궁에는 내행전인 상궐과 좌우 부속건물, 익랑 등 72칸 반, 상궐의 삼문 바깥에 외행전인 하궐과 응청문(凝淸門), 내삼문 등 154칸이 있었다고 한다. 행전의 동편에는 객사인 인화관(人和館)이 있었다. 1688년(숙종 14년) 상궐 뒤에 재덕당(在德堂)을 지었고, 1711년(숙종 37년) 행전 북쪽에 종묘를 봉안하는 좌전과 남문 안에 사직을 봉안하는 우실을 지었다. 1798년(정조 22년) 행전 외삼문의 상루인 한남루(漢南樓)를 세웠고, 1829년(순조 29년) 인화관을 수리했다. 남한지의 ‘인조가 행전에 머물렀으며 숙종과 영조, 정조가 영릉 참배 시 이곳에 머물렀고 유수의 아문이 있는 곳이 아니다’라는 기록으로 미뤄 처음에는 역대 왕들이 실제로 머물었던 곳이나 후에 유수의 치소(治所)로 사용됐던 것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행궁은 동남방향의 주축을 따라 지대가 높은 서편에 상궐을 세우고, 동편에 하궐과 정문을 차례로 배치해 전통적인 삼문삼조(三門三朝)의 기본 궁제를 따라 건축했다. 상·하궐 좌우에는 행각을 동서 방향으로 시설했고 행궁의 외곽 담장 내부에 상궐과 북행각지를 둘러싼 내곽 담장을 뒀으며, 상·하궐과 정원지 사이에도 담장을 둬 공간을 따로 구획했다. 1999년 발굴조사 결과 내행전인 상궐은 초석 배열로 미뤄 정면 7칸, 측면 4칸의 규모이며, 정면 5칸, 측면 2칸의 본체 사방에 한 칸씩의 퇴를 두른 구조임을 알 수 있었으며 외행전인 하궐은 후대의 건물 축조로 인해 교란된 상태이나 정면 7칸이 남아 있었다. 남한산성행궁은 비교적 초창기에 건립된 것으로 내외 행전과 부속건물, 누각 뿐만 아니라 종묘와 사직을 봉안할 시설까지 갖춘 가장 큰 규모의 행궁으로서 역대 왕들이 머무는 등 실제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수어장대(守禦將臺:경기도유형문화재 제1호. 1972년 5월 4일 지정)=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만들어진 4개의 장대 중 하나다.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쌓는 대(臺)를 말한다. 수어장대는 산성 안에서 최고봉인 일장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어 성 내부와 인근 주변까지 바라볼 수 있다. 이곳은 병자호란(1636) 때 인조(재위 1623∼1649)가 직접 군사를 지휘해 청나라 태종의 군대와 45일간 대항해 싸운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1층 누각으로 짓고 서장대라 불렀으나, 영조 27년(1751)에 이기진이 왕의 명령으로 서장대 위에 2층 누각을 지었다. 건물의 바깥쪽 앞면에는 ‘수어장대’라는 현판이, 안쪽에는 ‘무망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무망루’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아들 효종이 청나라에 대한 복수로 북쪽 땅을 정벌하려다 실패하고 죽은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건물의 규모는 1층은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2층은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2층 4면의 바깥기둥은 1층의 높은 기둥이 연장돼서 이뤄진 것이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꾸며졌다. 지금 있는 건물은 1896년에 유수 박기수가 다시 고쳐 세운 것으로 인조 2년(1624)에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숭렬전(崇烈殿:경기도유형문화재 제2호)=조선 인조 16년(1638)에 지은 사당으로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뒷날 남한산성을 쌓을 당시 총책임자였고 병자호란(1636) 때 싸우다 죽은 이서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원래 건물 이름은 ‘온조왕사’였으나 정조 19년(1795)에 왕이 ‘숭렬’이라는 현판을 내려 숭렬전으로 이름을 바꿨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정조대왕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나 정조의 인품과 성업을 칭찬하면서 혼자 있기가 쓸쓸하니 죽은 사람 중에서 명망있는 신하를 같이 있게 해 달라고 해 이에 정조는 남한산성을 쌓은 공로자인 이서를 같이 모시게 했다고 한다.
▶청량당(淸凉堂:경기도유형문화재 제3호)=이회와 그의 부인 그리고 벽암대사를 모신 사당이다. 모시고 있는 초상화는 한국전쟁 때 분실돼 훗날 새로 그린 것이다.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남쪽의 공사를 맡았던 이회는 기한 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하게 되자 공사비를 탕진하고 공사에도 힘쓰지 않아 기일 내에 끝내지 못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했다. 그의 부인도 남편의 성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자금을 마련해 오던 중에 남편이 처형됐다는 소식을 듣고 한강에 빠져 자살했다. 그 뒤에 이회가 쌓은 남쪽 성벽이 다른 성벽보다도 더 튼튼하고 완벽하다는 것을 알게 돼 그의 무죄가 밝혀지자 그의 넋을 달래기 위해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안쪽 정면에 이회의 영정(초상화)이 있고 그 양옆으로 처첩(부인과 소실)과 벽암대사의 영정이 있다.
▶현절사(顯節祠:경기도유형문화재 제4호)=병자호란(1636) 때 3학사 윤집·홍익한·오달제의 넋을 위로하고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3학사는 적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청나라에 끌려가 갖은 곤욕을 치르고 참형을 당했다. 조선 숙종 14년(1688)에 그들이 끝까지 척화의 의리를 내세우던 곳인 남한산성 기슭에 지었으며, 숙종 19년(1693)에는 나라에서 ‘현절사’라 이름을 지어 현판을 내렸다. 우국충절을 장려할 목적으로 지었으므로 모든 경비를 나라에서 지원했다.

   
 

숙종 25년(1699)에 이르러 3학사와 같이 항복하기를 반대했던 김상헌, 정온 등 두 충신도 함께 모시고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앞면은 제사지낼 때 활용할 수 있도록 퇴칸으로 개방했고, 옆면은 바람막이 풍판을 달고 방화벽으로 마감했다.
고종 8년(1871) 전국의 서원 및 사우에 대한 대대적인 철폐 때에도 제외돼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다.
▶침괘정(枕戈亭:경기도유형문화재 제5호)=세운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조선 영조 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다시 지은 후에 침괘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 일대는 예로부터 백제 온조왕의 궁궐터였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며, 침괘정의 오른쪽에는 무기를 보관하던 무기고나 무기를 만들던 무기제작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앞면 7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안쪽에는 온돌이 설치돼 있고, 현 건물구조로 볼 때 근처에 있었던 무기고나 무기제작소의 집무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무관(演武館:경기도유형문화재 제6호)=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으로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함께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연무당으로 부르던 것을 숙종(재위 1674∼1720) 때 ‘연병관’이라 쓴 현판을 하사해 통칭 연병관 또는 연무관이라 부르고 있다. 이곳에서 무술을 닦은 무사들 중 무예가 뛰어난 사람은 선발돼 한양으로 진출했다고 한다.
건물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벽은 널벽으로 좌우 벽에 널문을 3개씩 설치했다. 앞면은 벽이나 문이 없이 개방돼 있는데 흔적이 남아 있어 여러 차례에 걸친 보수공사로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