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선 안양시의회 의원

 10여 년 전이었던가? 갑자기 몰아닥친 IMF로 부도기업이 속출하고 200만 명에 달하는 실업자가 양산됐으며 구조조정이라는 서슬퍼런 칼날 아래 한 가정의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은 하루아침에 실직자로 전락 돼 버리던 눈물겹던 시절이 우리에겐 있었다.
올해 대학 4학년생 아들이 초등학교 때의 일로 기억난다.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나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이야기를 건넨다.

“엄마, 오늘 담임선생님께서 우리 반 아이들 모두 눈을 꼭 감으라고 하더니 아버지가 지금 실직 중인 사람만 조용히 눈을 뜨세요”라고 했다며 소식을 전해준다.
가정환경을 조사해야 하는데 어떻게 조사하는 것이 같은 또래들에게 노출되지 않고 실직 부모님을 둔 어린이의 자존심도 상하지 않게 조사하는 방법일까를 혼자 연구하신 선생님께서 내리신 최종 조사 방법이었다고 했다.

갑자기 어려워진 IMF체제 속에서 가정환경 조사를 위해 아이들을 자리에서 일어서게 하거나 손을 들라 하면 친구들이 눈치챌까 염려했고 어린 마음에 수치심이라도 들세라 자존심이 상할세라 걱정했으며 짖궂은 친구들이 손을 든 친구를 왕따 시킬까 또한 걱정을 했든 게다.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의 동심에 상처를 주지 않고 푸르고 원대한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배려했든 게다. 모두 눈감고 해당자만 조용히 눈을 뜨게 하면 옆자리에 앉은 친구조차도 눈치를 챌 수 없고 오로지 선생님만 파악할 수 있는 아주 기발한 조사 방법이라고 했다.
지극히 조심스럽게 아이들의 자존심을 지켜 주면서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의 가정 경제사정과 가정형편을 파악할 수 있었을테고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연구하며 갑자기 닥쳐온 어려움에 힘들어 하는 학생들의 학비와 급식비 등의 지원을 소리없이 해왔으리라 믿는다.
며칠 전 안양의 한 여고생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를 다녀와서 거기서 받은 전단지에 유서를 써 놓고 아파트 창문에서 투신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투신자살한 여학생의 부모는 기자회견을 열고 경기도교육청과 청와대 등에 보내는 민원을 통해 “학교의 잘못된 교육행태가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비판한 바 있다.

학교에서 학비지원 신청서를 나누어 주기 위해 기초생활수급대상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보라고 한 담임교사의 한마디에 수치심를 느끼고 자존심이 상한 사춘기 여학생은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투신자살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해 꽃다운 생애를 마감했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가 없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무심코 던지는 수많은 말들이 누군가의 가슴에 비수가 돼 꽂히고 상처로 남고 아픔으로 남고 수치심을 유발해 치유할 수 없는 아픔으로 남을 수 있음을 기억하자.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힘들어 하는 이웃들에게 따뜻한 한마디 말과 사랑의 손길로 배려하고 보듬어 나가는 가운데 사랑 가득한 살맛나는 사회를 만들어 가도록 하자.
여린 가슴에 내재돼 있는 수치심으로 차마 일어서지지 않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서게 하거나 손을 들게 하기보다는 모두 눈을 감고 해당자만 조용히 눈을 뜨게 하던 어느 선생님의 자애로운 음성과 빛나는 센스, 아름다운 배려 그리고 사랑 가득한 지혜가 한층 그리워지는 시간 “조용히 눈을 뜨세요”라는 선생님의 사랑 담긴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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