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성주 인천시립무용단 수석단원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 소재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으로 출근하면 몸을 가볍게 풀고 기본 무를 시작으로 하루 전부를 연습, 연습의 반복으로 지낸다. 퇴근해서는 연구소에서 작품구상, 활동구상 등 온통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무용을 전부로 살고 또 공연이라도 잡혀 있으면 몇달간 공연준비에 모든 열정을 쏟아붓는다. 그러다 공연날짜가 다가오면 긴장하기 시작한다. 과연 관객이 극장을 메워 줄 것인가? 270만 도시 중 예술대학이 없는, 대학에 무용과도 없는 무용예술이 척박한 도시 인천에서 무용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힘겹기만 하다.
나의 꿈은 권투선수였다. 어렸을 때 별명은 쌈(싸움)닭이다. 어렸을 때 다른 아이들보다 큰 덩치가 내겐 무기였다. 하굣길, 일단 모자를 삐딱하게 돌려쓰고 똘마니 후배에게 들려줬던 가방을 옆구리에 낀다. 그리곤 교복상의 맨 위 단추를 풀고 한 쪽 다리를 불량하게 흔들며 서서 만만한 녀석들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이미 나의 출연을 예상하고 기가 죽은 녀석들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통행료(?)를 지불하고 학교를 향해 뛰어간다. 나의 통행료 징수에 불만을 품은 녀석들이 있다면 그 날은 전쟁을 선포하고 외진 공터에서 내가 이길 때까지 싸우다 피를 보고 돌아간다. 그 모습을 본 녀석의 할머니는 우리 집으로 쫒아와 흥분한다. 어머니는 일단 부지깽이를 들고 “행주 이 눔 어디 갔어!” - 집에서는 성주가 아닌 형주로 불렸는데 우리 어머니의 사투리가 끼어 들어가 ‘행주’라고 부르셨다 - 어머니 그 목소리에 ‘아차 올 것이 왔구나’ 뒷문으로 도망쳐 산 속에 숨어 날이 지면 슬금슬금 집안으로 들어간다. “밥 먹어!” 눈 흘기시며 한마디 하시면 이미 상황은 종료.
나는 늘 에너지는 넘쳤고 그 에너지는 싸움에서 권투로 옮겨 갔다. 1970년대 열광하는 권투팬들 중에 내가 있었다. 나는 팬의 입장이 아닌 권투선수가 돼 그 열광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인천으로 왔고 운동을 열심히 했다. 하지만 이미 권투는 나처럼 열광하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많지 않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 에너지는 우연한 계기로 무용으로 옮겨 갔다. 시작은 어설펐다. 권투하던 내가 무용이라니 친구들과 가족들 모두 의아해 했고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관객들 앞에서 춤춰야 싸움 - 권투 - 무용으로 이어지는 그 에너지가 발산된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무용인은 관객의 힘으로 살아간다. 몇달씩 작품 준비를 하다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서 보이는 것을 만들어 가는 작업이 어려워도 관객에게 보여 주어야 할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 혼신의 힘을 다해 말하고자 하는 언어를 말 대신 온 몸으로 표현해 내야 하니 몸짓 하나 하나는 어떤 말을 하고 있어야 한다. 말하고자 하는 언어를 몸으로 열심히 설명해 느끼게 해야 하고 만족을 주어야 하는 것이 무용이다. 그래서 때로는 혼자만 느끼고 혼자만 만족하는 무용이 아닌 관객입장에서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보자 하다가도 다른 무용인들에게 ‘너무 가볍다’라는 질타가 두려워 슬쩍 우회하기도 한다.
무용은 관객을 위해 존재한다. 관객이 고개를 돌릴 때 무용은 의미를 잃는다. 하지만 무용공연을 많이 보지 못한 관객의 입장만 고려할 수는 없다. 그것이 어려움인 것이다. 무용 인구의 저변 확대라는 의미에서 이해하기 쉬운 작품을 공연하는 것도 좋지만 무용 마니아층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인천은 관객층이 많다. 무용인의 한사람으로서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관객층의 층간 격차를 줄이고 관객의 수준을 높여 무용의 발전을 꾀해야 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작품을 구상하는 데 있어 많은 고민을 안고 시작한다. 이야기가 있는 서사적 작품을 할 것인가, 아니면 추상적인 시적인 작품을 할 것인가부터 과연 관객들이 작품에서 의도했던 바를 이해할 것인가 구상했던 작품을 다시 회의해 수정하기를 여러 번 반복하게 된다. 보여줄 준비가 되면 오랜 동안의 고민과 걱정과 땀이 하루 아니면 이틀의 공연에서 관객의 수나 수준으로 위로를 받는다. 공연이 끝나면 오랜 시간 동안 애쓰고 힘들었기에 허탈하기도 하지만 실로 관객의 박수갈채는 어려운 작업인 작품을 다시 구상하고 무대에 서는 의미가 된다.

요즘 먹고 살기 힘들다고들 한다. 애들 학원도 줄여야 할 판이고 외식도 줄이고 허리띠를 졸라 매야 살아남는다고들 한다. 이런 판국에 왠 공연관람이냐고 생각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경제가 어려우면 관객이 보이게 줄어드는 곳이 인천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술은 배부른 사람들의 특권이라고 여긴다. 과연 예술이 가지는 가치는 어디까지 일까? 오늘도 나는 심판을 기다리는 권투 선수처럼 무대에 선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