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르네상스기를 대표하는 사상가인 몽테뉴(Montaigne)는 모럴리스트이면서도 온당한 회의주의 정신에 입각해 독서와 저술 활동에 몰입했다. 그는 다른 사람에 대한 포용, 다른 것에 대한 가치, 다양함에 대한 존중 등 시대적 간격을 뛰어 넘는 탁월한 시각으로 오늘날까지도 무시할 수 없는 사상적 영향력을 유지해오고 있다.

몽테뉴가 주창한 유명한 명제인 <Que sais-je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구절은 인간의 이성, 인식력, 그리고 학문적 지식의 허망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성에 대한 깊고 날카로운 관찰에서 우러난 상대주의와 패러독스, 또는 인간에 대한 자비와 관용의 표현이며, 후세의 과학주의, 민주주의의 원천이 됐다.
그는 자아 인식이 지식과 지혜의 출발점이라고 보았으며, 인간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성찰이 다른 어떤 주제보다도 그 자신을 향해 쏠리는 것은 자아 연구야말로 인간 본성을 배울 수 있는 학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을 알 수 없다면,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항상 “나는 누구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하고 묻게 된다. 바로 이 질문이야말로 동서고금을 통해 인간이 자신에게 던져 온 변함없는 질문이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이 물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인생이란 무엇이냐는 이 물음, 그리고 이에 뒤따르는 또 하나의 질문, 즉 우리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물음은 매우 어렵고 그 범위도 매우 넓다. 옛날의 성현들로부터 오늘날의 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사람들이 이 물음에 대답을 주어 왔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가 강조한 영생, 석가가 말한 공(空), 공자가 말한 인(仁)과 같은 천차만별의 개념들을 상기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것을 학교의 교실에서 배웠거나 또 독서를 통해서 스스로 알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개념들이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문제가 더 분명해지기는 커녕 더 어려워지기만 한다. 
몽테뉴처럼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의심을 더 귀중하게 여기면서 살아가는 삶은 정신적으로 매우 풍요로울 것이다. 우리는 철학 공부를 통해 자기가 품어 온 생각에 대한 의심을 품고, 더 값진 새로운 의심의 길로, 그리고 마침내는 올바른 길로 들어서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또 그림이나 음악을 감상하면서 자기 자신의 편견을 의심하고 그것에서 해방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철학적·종교적·예술적 체험 앞에 우리 자신의 마음을 활짝 열어 놓음으로써 우리는 한군데에 고정됨이 없이 더 깊은 인식과 더 넓은 이해와 더 큰 지혜를 향해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외침이, “나는 무엇을 아는가?”하고 몽테뉴가 자신에게 던진 물음이, 그리고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결연한 구도 정신을 새삼 상기해본다. 아득한 옛날부터 이런 말들이 한없이 되풀이 돼 왔다는 사실은 인류가 아직도 보편타당한 앎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주는 증거인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고 예술과 학문의 긴 전통을 이어온 것은 완전한 앎을 지향하면서도 불완전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의 나라에는 예술이 없다”는 앙드레 지드의 말은 참으로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을 통해 그는 불완전한 인간들이 완전을 향해서 하는 행위를 예술이라 규정짓고, 이러한 행위는 언제나 어디까지나 불완전한 행위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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