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양심과 도덕과 정의에 입각해서 전쟁을 반대하는 일부 사람들의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 오기는 하지만 그토록 많이, 목소리 크게 전쟁반대 파병반대를 외치던 입들이 지금은 거의 조용해졌다. 예상 외로 전쟁이 너무 싱겁게 빨리 끝이 나버려 맥이 빠진 것인가. 전쟁이 끝났다는 것은 곧 소리 높여 반전을 외치던 사람들에게 바로 그 반대할 대상(사안)이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니 따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딘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들이 내세웠던 명분 때문이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들이 그렇게 전쟁 반대를 주장했던 `명분'이 하나도 충족되지 않았는데 어째서 침묵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소설가 구의원 시민단체 간부 교사 노조원 하나같이 평화와 반전을 외치던 사람들이 왜 모두 입을 닫고 있는 것일까.

반전을 말하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번 이라크 전쟁이 `명분 없는 더러운 전쟁이기 때문에 반대'하며 그런 까닭에 `우리 헌법을 위배하면서까지 파병을 해서는 안 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 명분은 하다 못해 초등학생들에게까지 받아들여져서(?) 전쟁반대 파병반대의 대열에 동참하게 했다. 그들은 이 명분을 들어 노 대통령이 부시를 향해 단연코 `노우'를 말해야 한다고 역설했고, 어떤 단체는 파병을 찬성하는 국회의원들에게 낙선 운동이라는 무기를 들이대 심리적 불안을 안겨 주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도대체 그렇게 평화를 말하고 그렇게 서슬 퍼렇게 반전을 외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태가 그들이 입을 다물도록 돌변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뒤늦게나마 이번 전쟁에서 어떤 `합당한 명분'을 찾아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고, 그 때문에 더러웠던 전쟁이 `더럽지 않은 깨끗하고 명예로운 전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오늘까지 미국이 전쟁을 일으킨 어떠한 팩트도 변화된 것이 없는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단 한 가지 있다면 사담 후세인이 `한 강대국의 공연한 행패에 의해 실로 억울하게 코너에 몰린 선량한 지도자'는 아니었다는 사실뿐이다.

실제로 아랍권에서도 고개를 흔드는 그런 독재자 후세인의 실체를 보았기 때문에 모두가 입을 다문 것이라면 그들이 주장하던 반전 반 파병의 구호는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반전 반 파병을 외친 동안은 결과적으로 후세인의 독재를 옹호한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명분에 따라 전쟁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진정한 평화주의를 구현하려는 태도도 아니라는 점이다. 도대체 전쟁의 명분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그 합당한 기준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 어떤 합당한 명분만 있다면 언제든지, 또 얼마든지 파병을 하고 참전을 해도 무방하다는 말인가.

전쟁은 `적'이라고 불리는 상대를 쓰러뜨려 굴복시키는 것이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애초부터 합당한 명분을 가졌었다면 이라크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군인은 물론 무고한 시민들, 심지어 여자와 어린 아이들에게까지도 크나큰 희생을 강요했을 것이 아닌가. 이것이 명분을 말하면서, 그래서 전쟁을 반대하며 머리 속에 그리고 있던 그들의 평화란 말인가. 열 번을 고쳐 말해도 이것을 평화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 전쟁은 끝났다.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미국이 아닌 이라크를 향해 반전을 외쳤다면 독재자로 판명난 후세인 단 한 명만 피해를 본 채 전쟁 없이 끝났을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철학자 앙드레 글뤽스만, 파스칼 브뤼크네, 영화 감독 로맹 구피 등이 르몽드에 공동으로 기고한 글에서 프랑스가 유엔의 결의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한 선언은 유럽과 유엔·나토를 마비시켰고 이라크 독재자를 굴복시킬 비군사적 가능성을 소멸시켰다”는 구절을 되씹게 된다. 인류의 역사란 그런 것인가. 반전을 외치던 사람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김윤식/시인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