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가끔 전화로 ‘짐승 같은 숨소리’를 내뱉기도 하면서. 그리고 급기야 나의 사적인 남자관계까지 그 시선이 개입하기 시작한다.] 이런 이야기의 전개라면 우리는 스토킹이나 관음증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나를 집요하게 지켜보는 그 끈적하고 불쾌한 시선. 영화 속 마그다는 자신을 지켜보는 그 눈빛에 상당한 불쾌감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피핑 톰(Peeping Tom:관음증 자를 일컫는 말) 같은 그 시선의 주체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30대 중반의 마그다에겐 풋내기 같아 보이는 19세 소년 토맥의 모습으로. 폴란드의 거장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1995년도 작품인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그의 십계 시리즈 중 하나로 ‘간음하지 말라’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영화다.

토맥은 친구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망원경을 통해 앞집에 사는 여자를 훔쳐보게 된다. 어찌 보면 10대의 단순한 성적 호기심으로 시작된 그 훔쳐보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게 된다. 항상 비슷한 시간 전화를 걸어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는 그는 마그다에겐 불쾌한 존재였지만, 사실 토맥의 바라보기는 애정과 관심의 시선이었다. 그래서 그는 몰래 지켜보는 것을 그만두고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는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라 했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그저 욕망이라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허벅지 속으로 토맥의 손을 이끌고 ‘이게 사랑이야’라고 냉소적으로 말한다. 그녀의 차가운 행동에 충격을 받은 토맥은 자신이 순수하다 믿었던 사랑의 감정과 잠재된 욕망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그리고 결국 원죄를 처단하기 위해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 둘의 입장은 바뀌고, 마그다가 병원에서 퇴원한 토맥을 바라보게 된다. 어떻게 지내는지, 아픈 건 다 나았는지. 그리고 토맥을 병문안 간 마그다는 그의 방에서 자신의 집으로 향한 망원경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들여다본다. 자기의 눈이 아닌 토맥의 시선으로. 그리고 슬픔으로 가득 차 울고 있는 자신을 따뜻하게 다독여주는 토맥을 보게 된다.

관음증적인 느낌으로 시작하지만 욕정으로 가득찬 축축한 시선이 아닌, 따뜻하게 보살펴 주는 느낌을 받게 하는 이 작품은 해석하기에 따라서 절대자의 시선을 보여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초반, 토맥은 마그다의 우는 모습을 보고 아주머니에게 묻는다. ‘사람은 왜 우나요?’라고. 그 물음에 ‘외로워서 운단다’고 답해 주던 아주머니. 그리고 토맥은 방으로 들어와 울고 있던 그녀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본다. 마치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주듯이. 영화를 보다보면, 어느새 토맥의 시선에서 위로를 받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세상을 살다보면 때로 우리는 영화 속 마그다처럼 자기기만을 하며 몰래 눈물을 훔치는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외로움을 감싸 안아주는 누군가의 따뜻한 시선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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