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뻔해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첫사랑을 닮은 여인을 만났다는 남자들의 너무 식상한 그런 말. 무더운 여름에 뜬금없이 한 친구는 첫사랑을 닮은 여자를 만났는데 지금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눈앞에 그 여성인지 아니면 추억을 되살려주는 첫사랑의 환영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그런 친구의 고민을 듣다가 나는 1958년도 영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이 생각났다.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 해도 끊임없이 꼬이고 엉켜 들어가 어질어질한 복합적인 감정에 빠져들게 하는 영화 현기증은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의 본질은 과연 무엇이었나?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게 한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고소공포증에 시달리는 스카티는 사립탐정이다. 그런 그에게 한 친구가 정신분열의 증상을 보이는 자신의 아내의 신변 보호 차, 미행 겸 감시를 해 달라는 부탁을 한다. 금발머리의 고상하고 아름다운 매들린은 어딘가 슬픈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런 그녀의 하루하루를 관찰하던 스카티는 친구의 아내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된다. 비록 이뤄지기 힘든 사랑이긴 하더라도 스카티가 자신의 감성을 그녀에게 고백하기도 전에 그녀는 높은 교회의 탑 위에 올라가 자살을 하게 된다. 그리고 고소공포증이 있던 스카티는 그런 그녀의 행동을 막지 못한 것에 자책을 하며 괴로운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갈색 머리의 주디라는 여인을 보게 되는데, 죽은 매들린과 너무도 닮은 모습에 점차 끌리게 된다. 그는 예전의 매들린의 모습을 현재의 주디에게 덧씌우며 사랑의 감정을 키워 간다. 그리고 급기야는 금발로 염색한 주디를 보며, 마치 죽은 매들린이 살아 돌아온 듯 감격에 빠져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 하지만 우연의 일치일까? 주디는 옛 여인의 그림자를 너무 많이 담고 있었고, 결국 스카티는 주디와 매들린이 같은 여성으로 스카티를 혼돈시키기 위한 일종의 음모가 있었음을 밝혀내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죄책감을 느낀 주디이자 매들린은 정말로 교회 탑 위에서 몸을 던져 자살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광경을 다시 한 번 더 지켜본 스카티는 그의 오랜 고질병 같은 고소공포증을 떨쳐 버리게 된다.

왜 사랑이란 이름엔 본질은 사라지고 욕망만이 남는 것일까? 왜 그는 그녀를 있는 그대로 보려 하기보다는 닮은꼴의 모습으로 만들며 과거에 이루지 못한 옛 여인의 환영을 투사하려고 하는 것일까? 우리가 사랑이라 칭하는 이름 속에 사랑이라는 본질적인 감정이 차지하는 비중은 과연 얼마나 될까? 욕망, 소유, 추억 등 때론 이런 것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허울을 쓰고 우리의 감정을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웅크리고 있던 검은 욕망이 제거되는 순간, 마치 순수로 회귀하듯 스카티의 고소공포증이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강박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단어 속에는 욕망이라는 감정이 정당하게 들어갈 틈은 없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는 더욱 힘든 사랑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사랑이라는 단어 자체의 강박을 상쇄시키면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으며 동시에 그 감정의 강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풀리지 않는 질문들이 현기증을 유발하며 회오리쳐 온다. 사랑…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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