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 이 말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 각기 다른 해석들이 가능할 것이다. 이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뉴딜정책을 추진하며 남긴 말로, 당시는 대공항 시기로 사회적 불안함과 증명되지 않은 새로움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상황에서 무엇을 시도하기에 앞서 극복해야 할 것은 바로 그것에 대한 두려움 그 자체임을 명쾌하게 지적한 연설이었다. 수학적으로, 이론적으로 증명돼 밝혀진 것 이외에 우리에게 강력한 확신을 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어찌 보면 이성과는 반어적인 느낌으로 쓰이는 감정적 믿음인지도 모르겠다. 앞서 언급한 루즈벨트 대통령의 말처럼, 확고하고 명확한 감정적 상태는 대단히 큰 힘과 결속력을 보여주게 된다. 하지만 그 믿음과 확신이 의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어떨까? 오늘 소개할 영화는 2009년 2월 개봉작으로, 브로드웨이 화제의 연극을 영화화한 ‘다우트(의심)’이라는 작품이다.

1964년 뉴욕 브롱크스의 성 니콜라스 가톨릭 학교. 이곳에 새로 부임한 폴린 신부는 변화하는 사회에 맞춰 보수적인 가톨릭 학교를 바꾸려는 의지를 가진 인물이다. 하지만 이 학교의 교장인 알로이시어스 수녀는 학생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의 존재로, 원칙과 규율만이 학생들을 올바로 가르칠 수 있는 최선의 방침이라는 철칙을 고수하고 있다. 절제와 전통 금기에 대한 고수를 철저히 따르는 교장 수녀와는 달리 폴린 신부는 만년필 대신 볼펜을 사용하고, 설탕을 세 스푼이나 넣은 달달한 홍차를 마시며 대중가요에도 관심을 가진다. 이런 주임 신부가 탐탁찮았던 교장 수녀는 ‘이런 유형의 인간’이라는 자신의 잣대로 폴린 신부를 바라보게 되고, 그가 하는 일련의 행동들을 의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사제 서품을 받고 평생을 가톨릭에 바칠 것을 맹세한 신부로서 그 직무를 다하기 힘든 순간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허나 짐작하건데 그 중 특히 힘들 수 있는 상황은 바로 ‘육체적인’ 금욕일 것이다. 이 때문에 세속적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무성한 이야깃거리를 낼 수도 있는 소문으로 이보다 더 흥미롭고 위험한 것도 없으리라. 이 영화 다우트에서도 폴린 신부는 자신을 도와주는 흑인 복사 소년과 부적절한 관계임을 의심받게 된다. 여러 가지 상황과 정황으로 봤을 때, 교장 수녀는 주임 신부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무서울 정도로 망설임 없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리고 폴린 신부를 추궁하며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운다.

우리에게 확신이 없을 때, 의심만큼 커다란 힘을 발휘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의심에 찬 시선은 어떤 것을 봐도 자신의 의심을 굳히게 만드는 상황들로 모든 정황을 인식한다. 그럼으로써 결국 의심은 확신으로 자리잡게 된다. 즉, 의심의 눈은 보이는 대로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대로 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의심에 찬 확신은 진실을 규명하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믿음만이 옳았음을 증명하려고만 한다. 결국 진실은 어디에도 없고, 누구도 말할 수 없으며, 결국 진실 그 자체가 더 이상 무의미해지는 시점으로 전환되게 된다. 어떤 것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다는 것은 우리를 진취적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하지만 그 확신에 일말의 의구심이 든다면, 한 번쯤 자신의 확신을 재점검해 보는 것을 어떨까? 왜곡되지 않은 시선으로 본질을 바라보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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