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래시장은 추억이 있고 인심이 있어 어머니의 따뜻함을 지녔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
한 해 동안 농부가 땀 흘리고, 새벽부터 운송트럭이 먼 길을 날랐을 그 상품들은 안타깝게도 골판지 종이박스 조각 등에 자신들의 가치가 매겨진 채 고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재래시장의 '어머니의 따뜻함' 대신 '도시 아가씨의 세련미'로 가득 찬 백화점이 특히 재래시장과 차이점을 보이는 것은 가격표를 비롯한 각종 인쇄물이다.

하얀 바탕의 깔끔한 종이에 형형색색으로 눈에 보기 좋게 꾸며져 개·폐점 시간부터 가격 인하, 시간대 할인에 CCTV 감시지역 경고까지 백화점 입구부터 에스컬레이터 근처까지 고객이 가는 모든 곳에서 맞이하고 있다.

아무리 고품격 원스톱 쇼핑이 우선이라도 급하게 세일을 할 경우 매장에서 A4용지에 예쁜 글씨체로 인쇄해도 될 것 같지만 롯데백화점 인천점 POP실의 두 자매, 고하나(26)씨와 신주경(31)씨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백화점의 모든 인쇄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저희 손을 거쳐야 해요. 단순한 인쇄작업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고객이 상품이나 백화점에 관한 정보를 잘못 알지 않으면서도 눈에 잘 띄게 만들어야죠. 상품을 고를 때 가격명찰표를 보고 들어가진 않잖아요.”
이 자매의 업무인 POP(Point Of Purchase)광고물은 ‘판매시점광고물’이란 뜻으로 매장 내 진열한 상품 설명이나 각종 행사 등을 소개하기 위해 설치하는 일련의 홍보 광고물로, 매장을 방문한 소비자들은 1차적으로 POP광고물을 통해 현장에서 구매욕구를 일으키기 때문에 최근 더욱 각광받는 추세다.

대체로 전단지가 나오기 전날인 목요일에는 1천 장이 넘는 물량을 소화하지만 특히 얼마 전 인천점이 7주년을 맞았을 때나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는 백화점 내 모든 POP광고물을 바꿔야 해 하루에 수천 장을 작업해야 한다.

“하루 이틀하는 것도 아닌데 그 전날에는 긴장되서 잠도 못 자요. 사무실에 앉아서 하루 종일 모니터만 바라보며 일하다보면 정신까지 멍해지죠. 하나는 신혼인데 2주 동안 남편 얼굴도 못 봤어요.”
한꺼번에 수많은 작업을 하다보니 제 아무리 예민하다는 신 씨도 오타가 나와 ‘보브’를 ‘바브’로 쓰는 정도의 가벼운 실수는 얼른 재작업하지만, 본의 아니게 오타로 인해 욕이나 야한 단어가 만들어지면 웃음밖에 안 나온단다.

고 씨도 처음 일을 시작할 때 구두브랜드 ‘오브엠’이 헷갈려 ‘오브엥’으로 쓰기도 했지만, 담당자가 실수를 가려주기 위해 고 씨 몰래 수정해 가는 바람에 한동안은 ‘오브엥’이란 브랜드가 있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매장을 돌아다니다보면 ‘저거 내가 만든거다’라고 생각하면서 뿌듯함을 느껴요. 고객들이 저희 덕분에 즐겁게 쇼핑할 수 있잖아요. 엄청난 일은 아니더라도 꼭 필요한 일이죠.”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고 씨와 텍스타일에 관심이 많은 신 씨는 “다른 점은 싸우는 일도 많다는데 우리는 그런 일은 없네요”라며 그 사이 밀린 POP광고물 작업을 위해 모니터 앞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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