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운대’로 1천만 관객 신화를 재현한 윤제균 감독은 한때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1998년 IMF 사태로 다니던 광고회사에서 무급휴직을 당한 윤 감독은 소일거리로 신혼여행지에서 일어나는 기괴한 사건을 다룬 ‘신혼여행’을 집필, 한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당선돼 영화계에 발을 들이게 됐다.
직업을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지만, 때로는 또 다른 세상을 가져다 주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신세계백화점 인천점 캐주얼 브랜드 해지스에서 8년째 일하는 보기 드문 장수 매니저 류경례(38)씨는 10년 전만 해도 평범한 유치원 교사였다. 28살 때까지 유치원 교사로 일했던 류 매니저는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친구 따라 아르바이트로 유통계에 발을 들이게 됐다.
“유치원 교사를 한 경험으로 부모하고 아이 다루는 거 하나는 문제 없었어요. 토요일 팔았던 손님이 일요일 또 오는데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판매일이지만 워낙 능숙한 솜씨 탓에 경력이 많을 것이라는 ‘오해’를 사 초고속 승진, 3년 만에 한 점포를 책임지는 매니저 자리에 오르게 된다. 유치원 교사도 무난하게 잘 맞았다는 류 매니저는 뒤늦게 천직을 찾았는지 지난 2003년 신세계백화점 전사 친절왕, LG패션 친절왕 등 각종 친절상은 이미 휩쓸고 인천점 신입직원 교육강사로 활동했을 정도다.
“유치원 애들은 이름 외우는 게 중요하거든요. 지금도 고객 이름이랑 어떤 옷을 무슨 사이즈로 샀는지 기억해요. 모를 때도 잽싸게 컴퓨터로 고객카드를 검색하죠. 한 번이라도 왔던 고객에게 정해져 있는 인사멘트 대신 ‘어머, 안녕하세요’라고 반갑게 인사하면 좋아하더라고요.”
약간 까무잡잡한 편인 얼굴색까지 판매에 활용, 주부들이 남편 얼굴색 때문에 밝은 색상 옷을 주저하면 직접 본인 얼굴에 대보는 등 100% 앞에 서 있는 고객에게 충실한 그 태도는 다른 고객들과 차별되는 ‘특별한 친근함’으로 다가간다.
“인천지역 고객들은 계절이 닥쳐야 옷을 사는 편이에요. 그래서 고객이 부담감을 느끼지 않게 아직 덜 추우니 지금은 그냥 보시고 다음에 사라고 권하죠. 어떤 손님은 왜 팔려고 안 하냐고 야단치기도 해요.”
이렇게 한 번 찾은 고객이 또 오고, 다른 고객을 데려오면서 매출은 자연스레 늘어 인근 다른 백화점에 위치한 매장보다 절반 정도의 매장 크기로도 두 배가 넘는 매출을 올리고 있다.
“손님이 옷이나 브랜드, 백화점이 아닌 나 때문에 찾아왔다는 느낌이 들 때 보람을 많이 느껴요. 상반기만 해도 불황 때문에 힘들었지만 지금은 고객들 덕분에 다 이겨낸 만큼 얼른 백화점을 증축해 매장을 확장, 고객들과 매장에서 커피 한 잔 마시는 것이 소원이에요.”
차분한 색상이 유행이라는 올 가을, ‘친절한 기억왕’ 류 매니저가 추천한 와인색 스트라이프 셔츠에 아가일 무늬 조끼를 베이지색 치노팬츠와 맞춰 입으면 왠지 ‘엣지남’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