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편리한 디지털보다 정겨운 아날로그가 좋을 때가 있다.

야학(夜學)은 아날로그다.

   
 

‘합격률 99.9%’라고 적힌 현수막을 내건 학원들이 범람하는 현실 속에 검정고시를 낙방한 불혹의 학생을 위로하는 20대 선생님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정겹다.

배움의 기회를 놓친 이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 때론 새로운 삶을 선물하는 야학은 그 순수함으로 오랜 세월 어두운 곳을 밝히는 등불이었다.

인천 야학이 태동한 지도 벌써 50여 년이 흘렀다.

시대의 변화에 맞물려 야학의 모습도 조금씩 달라졌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바로 그 ‘순수함’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야학의 모습을 지켜낸 것은 자신의 소신을 잊지 않고 학생들을 가르친 수많은 선생님들의 노력이다.

    # 예상과 달리 깔끔한 신돌야학
지난 28일 오후 신돌중·고등학교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우산을 들기엔 다소 구차할 정도로만 내리던 겨울비에 한참을 헤매다 찾은 신돌야학은 인천시 남구 도화동에서도 인적 드문 건물 3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건물의 용도가 궁금했는데 마침 미리 나와서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아준 고석기(47)교장이 “병원으로 쓰였던 건물을 저렴하게 빌린 것”이라고 귀띔했다.
고 교장을 따라 들어선 신돌야학은 허름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깔끔한 모습이었다.

학생들과 교사가 함께 이용하는 컴퓨터가 몇 대 놓여 있고, 중등반과 고등반 교실이 양쪽으로 마련돼 있었다.

고 교장이 심혈을 기울여 마련했을 것이라는 짐작은 적중했다.

지난 1987년 개교한 이래 경인전철 동인천역 인근에서 운영돼 오던 신돌야학의 열악한 시설은 학생과 교사 모두에게 곤욕이었다.

별다른 지원도 없이 운영하던 터라 시설 보수는 꿈도 못꿨지만 지난해 이곳으로 이사오면서 꿈은 현실이 됐다.

고 교장은 “사실 제가 어느 정도 대출을 받았어요. 3천만 원 가까이 하는 돈을 쉽게 구할 수가 없었죠”라며 출처를 밝히곤 “그래도 건물 주인이 우리를 잘 봐서 저렴하게 들어오게 돼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라며 웃었다.

  # 고 교장의 든든한 후원자인 아내
11살이 된 아들이 있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적지 않은 돈을 남을 위해 대출받은 고 교장의 모습을 아내가 어떻게 바라봤는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기우였을 뿐이다.
지난 1999년 야학 제자의 중매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아내는 고 교장의 든든한 후원자로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단다.

엄마의 뱃속부터 야학을 다닌 아들은 학교에서 아버지 직업을 물으면 ‘교장선생님’이라고 답할 정도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27살의 나이로 인천에 첫발을 디딘 고 교장은 당시 타향살이의 설움에 야학의 문을 두드렸다.

처음엔 “직장인이라 제때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을 받기도 했지만 특유의 성실함을 인정받은 그는 3개월 만에 교사의 길로 접어들 수 있었다.

고 교장은 수학교사로 처음 수업을 진행했을 때 기초적인 것도 알지 못하는 학생들을 보곤 당황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고 교장은 “배움의 기회를 놓친 분들이지만 하고자 하는 의지는 정말 강했어요. 선생님에 대한 인식도 예전 본인들의 초등학교 때 가졌던 그 마음 그대로여서 어린 제게도 깍듯했어요”라고 회상했다.
시간이 흘러 교장이라는 직책을 맡았을 때 교사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당부했던 것은 “가장 쉽게 가르치고, 상처받지 않게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야학의 문을 두드렸을 땐 큰 결심을 하고 온 것이 분명한 이들에겐 모르는 것에 대한 창피함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 공부의 재미를 일깨워줘야 한다는 것.
이 같은 고 교장의 신념은 “야학을 찾아오는 학생은 거절하지 않는다”는 철칙으로 바뀌었지만 그만큼 웃지 못할 일도 많다.

정신장애가 있었던 학생이 몰래 유료전화를 쓰는 바람에 한 달 운영비보다 많은 금액의 전화비가 나오기도 했고, 노숙을 하던 청년이 자신의 짐을 들고 야학에서 살겠다고 찾아오기도 했다.

이 정도면 학생을 선별해서 입학시킬 법도 하지만 고 교장은 “공부하겠다고 온 사람을 내칠 수는 없어요”라고 말한다.

  # 정부의 틀에 못 맞추는 게 야학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 보조금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최근 보조금 지원이 줄어들면서 많은 야학들이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 고 교장은 “야학을 정부의 틀에 맞춰서는 안됩니다”라고 지적했다.

고 교장에 따르면 관공서에서 나오는 보조금은 매년 얼마의 금액이 나온다는 게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계획을 세우기가 어려울 뿐더러 다 쓰지 못한 부분은 돌려줘야 하기 때문에 운영에 애로사항이 따른다.

최근 평생교육시설 등록에 따른 보조금 지원책이 마련됐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수업실 면적, 시설·설비, 도서 보유량, 학생 수 등이 포함된 평생교육시설 등록 기준이 현실적으로 맞추기 어렵기 때문.
그렇다고 기준을 완화하는 것은 다른 목적을 가진 야학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날 수 있는 우려가 있기 때문에 옳지 않다.

야학은 태생적으로 자생해야 하기 때문에 정해진 틀에 맞추기보다 소량이라도 규칙적으로 지원해 줘야 한다는 게 고 교장의 생각이다.

   
 
고 교장은 “등록 기준을 맞추려면 돈이 많거나 사업을 하는 수밖엔 없지만 저마다 직장을 갖고 있는 교사들에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제도권으로 못 가기 때문에 야학을 찾는 이들에게 피해를 줄 수가 있다는 것이죠”라고 말했다.

요즘 고 교장이 보조금보다 더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은 학생 모집의 어려움이다.

한창 학생이 많았을 땐 50명이 넘었지만 지금은 중·고등반을 합쳐 18명에 불과하다.

입학 기간에 야학을 홍보해야 하지만 광고를 내는 것은커녕 ‘시설로 지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당 구청의 도움을 받기도 어렵다.

결국 교사들이 발 벗고 나서 동네마다 전단지를 붙이고 다니지만 학생 수를 늘리는 데는 큰 도움이 될 수 없는 현실이다.
한 시간이 넘게 이야기를 듣다보니 ‘어떤 마음으로 이 어려운 길을 20년이 넘게 걸어 왔을까’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고 교장의 대답은 지극히 간단했다. “내 만족을 위해섭니다”였던 것이다.

초등교육만 받았던 중년 여성이 야학을 통해 대학을 졸업하고 새 삶을 사는 모습과 40여 명의 학생들이 자신의 수업을 놓칠새라 경청하는 것은 말로서 설명할 수 없는 뿌듯함이었다는 것.
“야학은 희생이 아닌 봉사가 돼야 한다”는 고 교장은 “구성원 모두가 내 학교라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 야학의 가장 큰 장점이자 매력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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