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철웅 포천교육지원청 교육장/교육학박사

 유명한 작곡가 베토벤도 청력을 잃은 다음 저 유명한 제9번 교향곡 ‘합창’이라는 불멸의 작품을 만들지 않았는가?
이렇게 자신의 핸디캡을 극복해 불멸의 작품을 완성한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어느 철학자는 고난이 그 인간의 장래에 더 많은 희망의 불씨를 안겨 준다고 했다. 우리 민족에게 그 어려운 역사가 있었기에 오늘의 이 나라를 만들었으며, 나치의 핍박을 받은 유태인들은 오늘날 세계의 언론과 재계를 정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

필자는 교육 현장에서 점점 교육환경이 어려워짐을 보고 있으며, 현장을 방문할 때마다 의기소침해 하는 교원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학생들은 점차 개성이 강해지고, 학부모들은 자신의 입장만을 고집하는 경우가 점차 증가하고 있는 현실이다.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은 조급증에 못 이겨 교육을 외현적 잣대로만 재려고 하고, 정치인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자신의 업적을 치장하고자 교육문제를 들추어 내고 있는 현실이다.

교육은 이렇게 외현적으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일시적 투자로 효과를 검증할 수 있는 토목사업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다수의 학생보다는 한 사람의 마음 아픈 이를 바로 이끌어 주는 것이 교육인 것이다. 학업성취도를 향상시키려고 동분서주해 보았지만 그 결과는 구조적 현안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해결하기 너무 어려운 일이라는 교훈을 얻게 됐다.

관내 학교에 따라서는 결손가정 아동이 절반이 넘는 구조에서 학력만을 강조하기엔 버거움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밤늦게 방과 후 지도를 하다가 갑자기 찾아간 필자를 보고는 검은 양복에 백묵가루 무늬로 장식한 복장으로 미소를 머금은 그 선생님의 허탈감이 더 마음이 간다.

배우는 학생에게는 학력이 물론 중요하다. 필자는 생활지도적 학력관을 가지고 있다. 초·중학교 때의 학력은 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어서 일시적인 방황을 멈추고 마음을 가다듬었을 때 다시 공부할 수 있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것이 기본학력이다. 이때 기본학력이 뒤떨어지는 학생은 극복하기가 너무 힘들어 학력을 포기하고 다시 방황의 늪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초등학령기의 학력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것이다. 이를 필자는 생활지도적 학력관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주어진 여건은 고려하지 않고 전국 석차를 매기고 이를 언론에 발표하는 것은 경쟁의식만을 자극하는 학력관인 것이다. 이는 인본주의 사상에도 어긋나는 경쟁력 지상주의의 학력관인 것이다.

가르치고 가르쳐도 맨날 제자리인 경계선상에 있는 아동들을 가르치는 교사에게 그 학생은 지능이 경계선이기 때문에 특수학급에 입교를 권장해도 막무가내로 이를 거부하는 학부모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특수학급에 자녀가 입교하면 자신의 자존심이 상한다는 이야기에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교육 측정의 원리는 단순히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의 학력 향상을 기대하는 대상자에게만 측정이 임해야지 서로 믿지 못하고 경계선 아동까지 측정에 포함시키는 것 자체는 교육적 철학의 빈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는 초·중학교의 학력을 정착시켜야 한다. 그것은 학생의 장래를 책임지는 교원의 첫째 의무인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경쟁적 학력관은 절대 안 된다. 이로 인해 상처 받고 지나친 경쟁에 의한 부작용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력 평가의 대상자 선정도 학교 교사에게 맡겨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교육평가의 목적을 이루는 방법인 것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교육의 주체를 학생이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교육의 주 대상자는 학생이지만 교육 그 자체의 주체는 분명히 교사이다. 그것도 일선 학교의 담임교사인 것이다.

따라서 교육평가도 그 주체자의 의견에 따라 진정한 생활지도적 학력관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도시의 부유한 가정의 빈도가 높은 지역과 시골의 다문화, 조손결손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학교 학생들하고 경쟁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아니 경쟁이 되더라도 이는 불합리한 것이다. 오히려 부작용이 많아 상대적 박탈감만을 자극할 뿐이다. 물론 시골의 작은 학교지만 전국단위 1위의 학교도 관내에 있다. 이는 혼신을 다한 관리자와 교원의 땀방울이 있었기 때문이며, 이렇다고 해도 경계선 아동(IQ 70~80)이나 다문화가족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시 강조하건대 분명히 학력에 관한 국가적 관리는 필요하다. 그러나 이를 공개해서 시골에서 헌신적으로 땀 흘리는 교육의 주체가 되는 교원들이나 그 대상자들에게 심리적 불안감을 자극하는 정책이 아니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그리하여 우리 학생들이 자신의 능력에 따라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작은 소망에 미소 지을 수 있는 교육풍토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육의 주체가 되는 교원들에게도 한마디 전하고 싶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더 보살핌으로 이 사회의 등불이 되어 주기를 기대한다.

교육의 주체자들이여! 멈추지 마라. 그대들의 가슴에 기대는 젊은 영혼을 기억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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