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애국단을 결성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르고 순국한 신현구(1882년 12월 8일~1930년 7월 13일)선생이 2011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충남 논산 부적면 안천리에서 태어난 신 선생은 일찍이 고향인 논산에서 개척교회를 세우며 전도사업을 벌이다 지난 1906년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즈(Williams)를 만나 공주영명학교의 교사로 활동했고, 민족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에 뜻을 두고 1915년 서울로 올라와 이화학당 부속 여학교 교사로 교육사업에 종사했다.

또 1919년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신 선생은 이에 적극 참여해 일제의 무단통치에 항거했고, 이후 독립운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 추진체로서 대한독립애국단을 5월에 결성했다.

대한독립애국단은 단장인 신 선생과 함께 재무총장 김순호·김상덕 등을 중심으로 조직됐으며, 본부를 서울에 두고 강원도·충청도·전라도 등지에 지단을 설치했다.

애국단은 결성 초기부터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결돼 임시정부 지원단체로서의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국외에 설립된 임시정부는 국내의 재정적 후원 및 지지를 절실히 필요로 했고, 이에 신 선생은 대한독립애국단 단장으로서 임시정부 독립운동의 선전활동과 재정자금 조달, 임시정부의 국내 조직망인 연통부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서울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대동단, 대한민국청년외교단 등의 단체와 교류를 통한 결속을 강화해 제2의 3·1독립운동인 대규모의 만세시위를 추진한 신 선생은 1919년 11월 대동단의 조직이 일제에 발각돼 일본 경찰에 피체됐고, 이후 대한독립애국단의 전모가 드러나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만기 출옥 후에도 계속 항일운동을 계속해 1927년 1월 잡지 ‘심경(心鏡)’에 항일사상을 고취하는 글을 실었다가 다시 일제에 피체돼 징역 3년 6월형을 언도받고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1930년 7월 13일 순국했다.

이에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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