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왕을 셋이나 낳은 천복의 왕비, 파란의 무신정권시대를 타고난 정치력으로 돌파해나간 풍운의 여걸, 그러나 사후 재조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학술연구의 미답으로 남아 있는 수수께끼의 여인….

고려 제17대왕 인종의 왕비였던 공예태후(1109-1183)가 TV드라마를 통해 집중조명되고 있다. KBS는 고려시대 무인시대를 풍미한 무인들과 왕족을 서사적으로 풀어내는 `무인시대'를 매주말 두 차례씩 내보내고 있다.

이 역사드라마는 22일 현재 의종을 시해한 이의방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라고 공예태후가 아들 명종에게 당부하는 내용까지 진행됐다. 이날로 40회를 맞았으니 다섯달 동안 안방극장을 숨막히는 긴장으로 채워온 셈이다.

`무인시대'는 뒤틀리고 가려진 고려조 무인 영웅들을 민족사의 역동성과 진취성에 맞춰 재조명하는 드라마이다.

1170년, 이른바 `보현원의 참살'로 사실상 정권을 잡은 무인들의 치열한 쟁패를 서사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제목이 말해주듯이 주요 등장인물은 무신정권 시대를 연정중부를 비롯해 이의방, 이의민, 경대승 등 무신들이다.

이들 무인에 눌려 있으나 왕실법통을 잃지 않으려는 왕족의 대응도 만만찮다.왕실의 권위와 지략의 주인공이 바로 공예태후였다. 그는 무신정권의 등장에 따라 허수아비로 전락해갔던 왕실정치의 버팀목으로서 무신집권자들의 왕위 찬탈을 막기위해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대립했다.

역사상 남편(인종)과 아들 셋(의종ㆍ명종ㆍ신종)이 임금인 여인은 공예태후뿐이어서 74세로 타계한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나를 짐작케 한다.

공예태후는 요나라와 금나라가 흥망성쇠를 주고 받던 1109년(예종 4년)에 왕도인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1천 리가 더 떨어진 정안현(지금의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다.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로서는 더더욱 한미하고 궁벽하기 짝이 없었던 시골에서 한 시대를 주름잡은 왕비가 탄생한 배경에 대해 학계가 궁금해 할 정도다.

중서령(中書令) 임원후(任元厚)의 딸이었던 공예태후는 인종의 후처로 입궁한뒤 1127년에 왕자 현(의종)을 낳는 등 왕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끝에 1129년에 왕비로 책봉됐다.

이는 이자겸의 위세에 눌려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던 인종은 1127년에 이자겸 일당을 제거한 것과 직접 관련이 있다. 인종은 왕비였던 이자겸의 두 딸을 내치면서 공예태후를 정식 왕비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대외적으로 천리장성 이북에서 새로운 동북아질서가 구축되고 대내적으로는 이자겸의 횡포와 묘청의 난, 무신정변 등 정세가 숨가쁘게 전개되고 있을 때였다.

드라마에서 탤런트 김윤경이 열연하고 있는 공예태후는 이같은 난세 속에 대담성과 냉철함, 그리고 의지력 강한 여인으로 묘사된다. 무신들의 위협에 의연하게 대처하면서도 아들 의종을 폐위한 뒤 죽음에 이르게 한 이의방과는 타협과 대립을 반복함으로써 왕실의 법통을 이어나갔던 것이다.

공예태후는 유약했던 명종을 사실상 대신해 왕실정치를 이끌어나가 1392년까지 고려의 생명이 이어지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고려왕실의 명맥이 온전하게 계승됐겠느냐는 질문이 가능할 정도로 그의 활약은 컸다.

이같은 정치력 등에 힘입어 공예태후는 무신집권자들에게까지 존경받음은 물론 조선 초에 기록된 `고려사'에서도 탄생배경 등이 네 차례에 걸쳐 기록될 만큼 좋은 평가를 받았다. 남성이 주도하는 한국사에서 당당한 역사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예태후에 대한 후대의 재조명은 극히 미흡했다. 초중고 교과서에 한마디도 언급돼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이렇다 할 학술대회나 연구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KBS TV의 드라마 `무인시대'는 가려진 공예태후의 진면목을 일반대중에게 최초로 소개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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