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의 손끝에서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을 정갈히 한 여인이 조심스레 찻잔에 손을 가져간다.

“쪼르륵…똑. 똑.”
지그시 눈을 감고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어쩐 일일까. 방금 전까지 얽히고 뭉쳐 있던 가슴이 스르르 풀린다.

또래 친구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꽃다운 나이의 청소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소식이 연일 언론지 상을 장식한다. 개인주의가 미덕이라고 여기던 현대인에게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언제 내 일이 될지 모른다’는 현실의 냉혹함을 뼈저리게 각인시키는 나날의 연속이다.

   
 
답답한 현실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이귀례 규방다례보존회·한국차문화협회 이사장을 찾아 해법을 들어봤다.

이 이사장은 차를 마시는 법도와 예를 가르치며, 청소년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에 한평생을 바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힘겨운 시절을 보내고 있을 청소년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다”며 안타까운 시대 상황에 연방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이 같은 아픔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성심을 다하기로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특히 그는 무엇보다 청소년들의 미래를 위해 가정에서부터 학교에 이르기까지 선생·부모는 물론 정부·지자체·교육청 등이 항상 관심을 두고 인성교육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 우리 차의 향기로, 아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다
한국 차의 맛과 예절을 소개하며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마음의 안식과 위안을 주고 있는 이귀례 이사장.
규방다례보존회와 한국차문화협회를 함께 이끌고 있는 그의 관심은 늘 한 곳에 집중돼 있다. 30여 년 전 서울 광화문을 시작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오가며 전파했던 차문화 예절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
무엇보다 그가 더 정성을 쏟는 이들은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청소년이다.

차 마시는 법을 배우며 예절교육까지 받는다는 부담감에 처음에는 다들 고개를 젓기 일쑤지만 정감 있는 말투와 설명, 진심을 담은 이 이사장의 배려에 금세 우리 차의 향기에 젖어든다.

그가 벌이고 있는 차문화 예절운동은 어느새 인천지역의 자랑이 됐다. 신명여고 등 지난해 모두 20여 곳 넘게 실시한 교육을 통해 대략 5천여 명의 청소년에게 우리 차의 맛과 멋을 전하는 동시에 심신을 달랬다.

인천시 지정 무형문화재 11호 규방다례 기능보유자인 이 이사장은 지난 2000년부터 학교 현장을 돌며 청소년에게 한국 전통 차의 우수성을 알리고 예절교육도 함께 펼치고 있다.

   
 
이는 비단 인천뿐 아니라 민통선 대성동마을에서부터 흑산도 앞 작은 섬마을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린이나 청소년은 아직 습관이 완성되지 않은 시기라 차 문화를 익히면 금세 일반 생활예절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남을 배려하고 나를 낮추는 차문화 예절의 기본 정신을 배운 학생들을 꼭 다시 찾는데, 처음 대면할 때와 행동 하나하나가 달라져 있을 때 보람을 느낀답니다.”
그는 아이들에게서 보여지는 교육효과가 차문화 예절의 가장 큰 장점이라 자부한다.

“교육을 받으러 방에 들어오는 아이들에게 나갈 때 신기 좋게끔 신발을 되돌려놓고 들어오게 하고, 방석 위에 앉을 때는 털썩 앉지 말고 방석을 잡아당겨 앉으라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예절교육을 제대로 받은 아이들은 아무리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아무데서나 뛰거나 하지 않죠. 그만큼 차문화 교육이 아이들의 인성과 몸가짐에 작지만 큰 변화를 가져온다고 자신합니다.”

 # 형식 위주의 다도(茶道)는 버리고, 생활 속에 녹아든 차문화를 즐겨라
‘다례는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다.

사실 차문화가 보다 널리 전파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다례는 어렵다’는 편견에 있다 해도 무리가 없을 법하다.

이런 물음에 이 이사장은 “청바지를 입고 간소한 다기에 차를 내놓는다 하더라도 차를 대접하는 이의 정성과 이를 받아들이는 이의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고 답한다.

그만큼 이 이사장은 형식 위주의 다도(茶道)를 과감하게 버렸다. 차문화가 실생활 속에 녹아들려면 일반인이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최대한 간결해야 한다는 신념에서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옛 사대부 집안의 여인들이 이웃과 친지를 초청해 다회(茶會)를 베풀던 문화를 계승한 ‘규방다례(閨房茶禮)’다.

하지만 이 이사장은 편의를 지나치게 좇다 보면 자칫 기본 원칙이 무너질 수 있다는 점도 우려한다. 그런 이유에서 그는 좋은 차의 기준을 ‘물의 기운을 얼마나 잘 다스렸느냐’에 두는 것부터 정도(正道)를 찾고자 한다.

“차는 물이 가장 중요합니다. 콸콸 흐르는 물은 좋지 않고, 가장 좋은 물은 산에서 졸졸 흐르는 샘물을 떠다 돌과 항아리에 보관했다 물 기운이 잠잠해졌을 때 끓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현대 일상 생활에서는 수돗물이나 정수기 물을 바로 받아 끓이는 것보다 잠시 주전자 등에 담가 뒀다 윗 부분의 물만 사용하는 게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물 온도도 중요한데 팔팔 끊인 물을 70~80℃로 식힌 뒤 차를 우려내는 것이 좋고, 물을 끓이는 시간은 너무 오래 끓이는 것보다 30분 정도 적당히 끓였을 때가 낫다.

차를 따를 때도 마찬가지다. 주전자와 찻잔의 온도가 같게끔 따뜻한 물을 조금 찻잔에 따라 넣고 온도를 높여 준 뒤 차를 마시면 좋다.

차를 마실 때도 최대한 허리를 곧게 펴고, 허리를 굽히기보다 손만 움직여 의젓하게 마시는 게 차 예절의 기본이라는 게 이 이사장의 조언이다.

 # 동학농민운동가의 후손, 솔잎의 향기를 따라가다
인생의 반 이상을 차와 함께 동고동락한 그는 동학운동을 한 조부에게서 차 예법을 배웠다. 당시 조부를 찾아 온 지인들에게 솔잎차와 떡차 등을 대접하며 차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이 이사장은 여전히 당시 손님에게 끓여 드렸던 솔잎차의 은은한 향과 맛을 잊지 못한다.

그의 차에 대한 관심은 나이가 들어서도 변치 않았다. 어렸을 적부터 자연스럽게 접한 차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을 푸는 데 관심을 뒀던 것.
스스로 차에 대한 문헌을 찾아 공부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역사에도 눈이 텄다.

그렇게 혼자 하던 일을 뜻이 맞는 지인 몇몇과 함께한 게 지난 1979년 설립한 사단법인 ‘차인회’다.

   
 
차인회는 현재 한국차문화협회의 전신이기도 하다.

이 이사장은 여기서 옛 문헌을 기초로 한 연구를 통해 규방다례(閨房茶禮)를 정립했다. 규방(閨房)은 ‘부녀자가 거처하는 방’이라는 뜻으로, 여기에 차 다루는 법과 예의범절의 마음가짐을 담은 다례(茶禮)가 합쳐져 규방다례라는 정의를 내렸다.

무형문화재 지정도 이 과정에서 얻게 된 소중한 결과다.

현재 이사장으로 있는 ㈔한국차문화협회는 체계적인 차문화 교육을 통해 전문지도자를 양성하고 있는 곳으로 전국에 21개 지부와 2만여 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차문화협회가 주력하는 것은 자라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통문화 교육. 아이들이 모두 커서 일가를 이루고 가족들에게 차문화를 권한다면 전 국민 모두가 차를 즐기는 날이 곧 오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다.

이 이사장은 “우리 차의 맛과 멋을 즐기고 동시에 삶의 예절까지 배우고자 하는 분들은 언제든 규방다례보존회와 한국차문화협회의 문을 두드려 주시길 바란다”며 “저 역시 남은 한평생 인천은 물론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청소년들에게 우리 차의 혼을 전하기 위해 열과 성의를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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