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말 우리나라에는 개화의 물결을 타고 처음으로 학교가 등장한다. 그 이전에는 여성은 물론, 신분계급이 낮은 서민들은 감히 교육을 받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니, 사회구조상 그들이 교육을 받을 권리는 철저히 통제됐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지칭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안타까운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특히 여성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봉건주의에 밀려 교육이 미미하기 그지없었다. 이같은 여파일까 대명천지 근래까지 국민의 대표를 뽑는 선거에서 작대기 기호를 사용했음은 조선조때 남녀교육의 불균등 악습이 얼마나 뿌리깊었나를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여성교육이 미미했던 것은 남존여비 사상에 기초를 둔 현상임은 분명하지만 아마도 실리적 이유도 겸했던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효도의 최상급이 부귀공명하여 조상의 이름을 빛내는 것일진데 가르치더라도 과거를 보는 것도 아니고 출가를 하게되면 한마디로 써먹을 때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또한 여자의 미덕은 순종인데 너무 유식하면 `암탉이 울어서 집안이 조용할 날 없다'는 기우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결국 당시에는 배워도 활용할 수 없는 사회풍토와 조혼(早婚), 빈곤에 의해 여성은 교육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던 것이다. 그런데 기록에 보면 여성에게 글은 가르치지 않았어도 교양을 쌓게 했다고 한다. 눈을 가린 교양교육이 얼마만큼의 성과를 거뒀는지는 불보듯 뻔한 일이지만 그래도 당시는 인간으로서, 또는 봉건사회의 여자로 알아야 하고 행해야 하는 도(道)를 가르쳤다. 비록 여공(女功)이라하여 바느질, 수놓기, 농촌에서의 길쌈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물론, 이는 하인을 많이 거느린 상류계층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인이 알아야 하는 기본이었기 때문에 바느질과 수놓기는 그 첫 번째로 꼽혔다. 한마디로 당시의 여성들은 철저한 통제 속에 일만하다 평생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아주 다행한 일이다. 국민의 4대 의무속에 `교육을 받을 의무'가 포함되면서 이제는 첨단업종은 물론 사회곳곳에 많은 여성들이 진출해 있다. 그런데 최근 일부 부모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정부를 상대로 집회를 하며 초등학생들을 학교로 보내지 않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는 소식이다. 무엇이 옳은 지도 판단하기 어려운 어린이들이 집회 현장으로 내몰리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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