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미륵사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중 백제란 나라에 대해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아마 백제의 수도가 공주와 부여였었고 또 왜소한 패망국었다라는 것 정도 일 것이다. 하지만 백제에 관해서 하나 둘 따지고 들어가자면 그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던 나라에 스스로 탄성을 자아낼 것이다.
일찍이 백제는 한반도를 아우르고 멀리 일본에까지 문화를 전파한 나라였다. 일본에 불교를 전한 뒤 불상과 기와를 제작 할 기술자들인 노반박사, 기와박사를 보냈고 역학과 의학 전문가도 파견하였다. 신라의 황룡사 9층 석탑과 안압지를 만든 것 도 백제의 장인이었고 질 좋은 종이가 백제 지역에서 생산이 되었다. 이렇듯 백제는 경제적 여유와 뛰어난 기술로 우아하고 세련된 예술품을 많이 만들어 냈지만 나당 연합군의 말발굽 아래 많은 문화재들이 소실되고 또 일제 강점기에는 고고학 조사라는 명분으로 악질적인 일본인들에 의해 많은 무덤들이 파여 지금은 제 모습을 간직할 수 없는 나라가 됐다. 결코 뒤떨어진 나라가 아니면서도 많은 자료와 유물들이 소실되어 뒤떨어져야만 한다는 사실이 마냥 안타까운 백제.
그런 백제를 보기 위해 그 찬란한 역사의 한 부분이나마 조금이라도 찾아보기 위해 난 백제의 원찰이었던 익산 미륵사지를 향해 떠났다.

미륵은 석가가 돌아가신 후 56억 7천만년 후가 되면 석가가 미처 제도하지 못한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기 위해 용화수라는 나무 밑에 부처님의 모습으로 내려와 세 번 설법하여 모든 중생들을 남김없이 제도한다 한다. 익산 미륵사지는 이러한 미륵신앙이 만들어낸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이며 백제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대찰(大刹)이었다.

호남고속도로 익산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오면 처음 대하는 것이 미륵사지 서석탑의 모습과 함께 “보석의 고장 익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의 입간판이다. 보석의 고장이라는 말이야 어떻든 미륵사지는 익산을 대표하는 문화재가 틀림없음이 여기서 여실히 증명이 된다. 그리고 그 안내판을 따라 금마를 향해 약 20여분을 달리다 보면 우측으로 넓은 잔디광장에 둘러 쌓여있는 미륵사지를 만나게 된다.
미륵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 2 무왕편』에 나오는데 어느 날 무왕과 그의 아내인 선화공주가 사자사로 가던 중 용화산 밑 큰 못 가에 이르렀을 때 미륵삼존이 못에서 나타나 무왕과 선화공주는 예를 갖추어 절을 했다 한다. 그리고 선화공주는 이곳에 큰절을 이룩하면 좋겠다고 간청하였더니 이에 무왕은 사자사 지명법사의 힘을 빌어 하룻밤만에 못을 메우고 그 위에 절을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미륵사지라 한다. 실제로 이 미륵사를 발굴한 자리에서 못이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어 전설 아닌 전설을 뒷받침 해주는데 그 진위 여부가 어떻든 처음 본 미륵사지의 위용은 사람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우리 고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로맨스를 꼽으라면 아마 미륵사를 창건한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혼 이야기일 것이다. 마를 캐며 살던 백제의 평범한 소년 마동....즉 무왕은 “서동요”라는 향가를 지어 신라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고 그 일을 계기로 신라 진평왕에게 쫓겨난 선화공주와 결혼을 하게 된다. “서동요”에 대해서는 중. 고등학교 국사시간과 국어시간에 잠시나마 배운 기억이 있어 그 원문과 해설문을 실어 본다.

善化公主主隱(선화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남 몰래 정을 통해 놓고)
薯童房乙(서동의 침방으로)
夜矣卯抱古去如(밤에 몰래 안겨 간다.)

차를 세워놓고 미륵사지에 들어서자 저 멀리 미륵사지 기념관과 서석탑 그리고 동석탑이 쓸쓸하게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예전 신라의 황룡사(현재 경주의 황룡사지)보다 더 컸었다는 그때의 영화로움은 이미 사라 진지 오래고 쓸쓸하게 남아 있는 석탑만이 “여기가 미륵사지다.” 라고 말해 주고 있어 보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먼저 미륵사지 유물 전시관을 찾았다. 전시관 안에는 1980년에서부터 1995년까지 15년 간 실시한 미륵사지의 발굴 유물 400여 점과 함께 옛 미륵사의 복원 모습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고 밖으로 나왔더니 석탑이며 금당이며 사찰의 옛 모습들이 눈앞에 하나씩 그려지며 사찰의 번성함과 영화로움 또한 눈앞에서 펼쳐진다.
유물 전시관 바로 옆에는 천년의 세월을 버티고 서있는 서석탑과 컴퓨터로 설계 복원한 동석탑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은 소실되어 없어진 목탑이 서석탑과 동석탑 사이에 있었다 한다. 석탑사이의 목탑은 크기가 석탑보다 훨씬 더 컸었다 하니 눈앞에 상상으로 그려진 목탑의 위용이 느껴진다.

미륵사지의 서석탑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이며 현재 국보 제11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지금은 6층만이 남아 있지만 원래는 9층의 규모였다 한다. 한때 7층 설이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탑의 비례와 주변에서 발견된 노반(露盤)으로 보아 9층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탑의 형태는 일제시대(1915년) 보수공사를 핑계로 시멘트로 덧발라 놓아 흉측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동석탑의 을씨년스러움보다는 세월의 무게 탓인지 다정스러움이 느껴진다. 이 미륵사석탑(서석탑)이 목탑형식의 양식을 지니고 있어 우리나라 석탑의 발생의 기원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추녀의 살짝 올라간 부분이며 기둥의 배흘림 기법 등은 목탑을 꼭 닮았다.
미륵사석탑(서석탑)에서 또 하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석인상인데 천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 인지 형체를 거의 분간할 수 없어 안쓰럽기만 하다. 장승의 원형으로도 보고 있는 이 석인상은 세 구만 남아 있는데 원래는 네 구였던 것이 한 구가 없어져 세 구만 남게되었다.
천년을 견뎌 온 서석탑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동석탑이 있다. 1993년에 18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투입해 복원한 동석탑으로 남아 있는 서석탑과 발굴 조사 때 발견된 상륜부 노반을 토대로 컴퓨터로 엄밀히 계산하여 복원해 내었다는 동석탑은 새하얀 화강암에서 받는 느낌이 차갑기만 하다.
미륵사지에는 미륵사 석탑(서석탑)이라는 국보와 자칫하면 못보고 놓치고 갈 수 도 있는 당간지주라는 보물이 있다. 당간지주란 전에서 불문을 나타내는 문표, 그리고 불교 종풍을 드러내는 종파의 기와 같은 역할을 하였던 당을 걸었던 깃대의 지주를 말한다. 석탑의 맞은편에서 조용히 사람들이 찾아 주기만을 바라며 서 있는 이 당간지주는 조형미가 참으로 아름다워 꼭 들러 보고 가야 할 소중한 우리 문화 유산이다.

현재 미륵사지에는 주말이면 김밥을 싸 들고 소풍을 즐기는 익산 시민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입장료도 안 받을 뿐더러 10만평의 대지 위에 넓은 잔디가 그러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물론 이러한 것들을 모두 나쁘다고 나무란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미륵사를 소풍 그 자체만으로 끝내 버린다는 것이 아쉽다. 미륵사지는 분명 잃어버린 백제 역사의 한 페이지다. 왜소한 패망국으로 밖에 기억되지 않는 백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이 미륵사지를 통해 조금이나마 찾아봤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인 것이다.

그리스나 로마 신화는 훤히 꿰뚫고 있으면서 정작 우리나라 신화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사람들을 많이 봤다. 그리고 유럽의 고건축들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으면 서도 정작 우리나라에 있는 고건축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봐 왔다. 가까이 있기에 언제든지 접할 수 있다고만 생각하는 의식구조 속에 나도 그렇게 살아 왔나 보다.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으면 서도 이제야 미륵사지를 찾았으니 말이다. 떠나면서 창 밖을 바라보니 미륵사탑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서석탑의 온화함과 동석탑의 차가움 속에 옛 미륵사의 화려했던 모습이 다시 한번 눈앞에 그려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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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 통

자가용 이용시
호남고속도로 익산 IC에서 722번 지방도를 타고 익산 시내 방면으로 가다 보면 미륵 주유소가 있는 금마 사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우회전하여 함열쪽 722번 지방도를 따라 가면 우측으로 미륵사지가 나온다.

대중 교통 이용시
- 철 도
서울에서 익산간 기차는 약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익산까지는 3시간 10분 가량 소요된다.
예약 및 문의전화 : 서울역 02)392-7788, 익산역 063)857-7788
- 고속버스
서울에서 익산간 고속버스 역시 30분 간격으로 운행하고 있으며 대략 3시간 가량 소요된다
문의전화 : 강남고속버스터미널(호남) 02)6282-0600, 익산 고속버스 터미널 063)855-0345

※ 익산에 도착하여 길건너 버스정류장에서 60, 60-1번 시내버스 이용하거나 222, 555 좌석버스를 이용하면 미륵사지 정류장까지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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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 박

미륵사지에선 숙박할 곳이 없다. 익산 시내로 나와 터미널 근처에서 여관이나 호텔을 이용을 하는 것이 편하다.
- 그랜드 프라자 관광호텔 (063)843-7777, / 익산관광호텔 (063)85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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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타

현재 미륵사지 서석탑은 복원공사로 인해 초대형 철제 보호건물 안에 들어가 있다. 일제시대(1915년)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붕괴직전에 있던 탑을 시멘트로 보수공사를 한 후 오늘에 이르다가 시멘트의 부식과 석재의 균열로 다시 한번 붕괴 위험이 있어 80억 원이라는 엄청난 보수공사비를 들여 2007년까지 복원 공사를 한다고 한다.
- 미륵사지 입장료 :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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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의 익산의 문화유적

익산은 삼국시대 지형적으로 백제에 속했던 나라이다.
그래서 백제에 관한 문화유적들이 미륵사지 주변에 산재해 있다. 현재 보물 제44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왕궁리 오층석탑이라던지 보물 제46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동고도리 석불, 무왕과 그의 아내인 선화공주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쌍릉 등이 있다.
특히 동고도리 석불은 두기가 서로 마주보며 서있는데 각각 남자와 여자로 평소에는 만나지 못하다가 섣달 해일(亥日) 자시(子時)에 옥룡천이 얼어붙으면 서로 만나 회포를 풀다가 닭이 울면 서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전설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이 외에도 고려 충목왕 원년(1345) 진표율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는 숭림사란 사찰이 익산에 자리잡고 있는데 광해군 5년(1613)에 조성이 된 보광전(보물 제825호)과 지방문화재 제67호로 지정된 청동은입인동문향로가 있으니 익산에 온 김에 한번 둘러봄직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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