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힘은 최근 우리 사회에서 유행처럼 전파되고 있다. 이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채 뭐든 잘 될 거라는 무모한 환상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은 끊임없는 걱정과 불안을 낳는다. 반면 아직 닥치지 않은 일에 대한 근심을 접고 자신의 감정을 추슬러 주어진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하는 것. 좀 더 나아가 긍정적인 앞날을 떠올리며 마인드 컨트롤하는 것은 자신감의 상승과 확신, 추진력과 끈기를 북돋아 목표한 바를 이루는 것에 도움을 준다. 이것이 바로 긍정의 힘이다. 그래서일까. “괜찮아”라는 말도 ‘긍정의 힘’만큼이나 유행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방황해도 괜찮고, 실수해도 괜찮고, 아파도 괜찮고, 울어도 괜찮다. 물론 이 말들은 위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세상의 잣대와 기준에 얽매이기보다는 자신만의 관점을 찾는다면 지금 이 방황이, 이 실수가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일 뿐이니 괜찮다. 이 눈물과 아픔과 고통도 언젠가는 모두 지나가리라. 오히려 그 아픔은 성장의 자양분이 될 것이니 괜찮다고 말들 한다. 그러나 여기 “다 잘 될 거야. 모두 다 괜찮아”라는 막연한 말로 전혀 괜찮지 않은 상황을 위로하고 덮어버리지 말라고 호소하는 중년의 남성이 있다.

월터 블랙, 그는 승승장구했던 장난감 회사의 CEO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극도로 우울하다. 회사 경영에서도 물러나야 할 만큼 가망 없는 모습으로 매일 잠만 잘 뿐이다. 한때 더없이 화목했던 가족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두 아들은 아버지를 무가치하게 여기고 아내는 남편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녀는 밤낮 없이 바쁘게 일하는 쪽을 선택해 시체처럼 누워 있는 남편을 애써 외면한다. 그러나 이 가족이 처음부터 월터를 소외시켰던 것은 아니다. 우울증 치료에 권위있는 의사와의 정기적인 상담치료를 통해 그가 회복될 수 있기를 아내도 아이들도 바랐었다. 가족들의 바람에 월터도 처음엔 호응했다. 그러나 그는 상담치료도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다. 이후 삶의 의지마저 상실한 월터는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한다. 그러나 생을 마감하려는 순간, “가망 없는 네 인생을 구제하려 왔다”며 말을 거는 ‘비버인형’의 소리를 듣게 된다. 비버인형은 행복한 척, 괜찮은 척, 다 잘되고 있는 척하며 살지 말라고 월터에게 말한다. 그 말은 다른 어떤 말보다 월터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됐다. 그날 이후 월터는 비버인형만이 자신의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오로지 인형 ‘비버’의 입을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한다.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은 그러나 효과가 있었다. 붕괴 직전의 가족관계도 회복시켰고 내리막이었던 사업도 흑자로 돌려놓았다. 월터는 이 모든 것을 ‘비버인형’의 공으로 돌리며 그를 더욱 의지하며 한 몸처럼 살아간다. 하지만 마치 원맨쇼를 하듯 손가락인형을 통해 말을 하는 월터의 모습이 아닌, 본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오라는 아내와 주변 사람들의 요청에 그는 다시 공황상태에 빠져든다.
영화 ‘비버’는 막연하고 대책 없는 긍정의 힘을 믿지 않는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으니 자신을 혁명하고 정서 조절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는 서푼짜리 처방전과 입에 발린 ‘괜찮다’는 말은 위로도 치료도 될 수 없다고 외친다. 그 뿐만 아니라 황급한 긍정최면 역시 더 깊은 고통을 낳을 뿐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우리는 괜찮지 않은 현실과 불행한 자신을 마주하기 두려워서 ‘이 정도면 괜찮다. 앞으로 점점 나아질 거다’라는 말로 염증을 덮어 왔는지도 모른다. 나의 고통과도 소통할 용기조차 없는데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포함한 누구와도 진심을 털어놓지 못한 채 살아가다보니 우울증이 현대사회에 만연한 것은 당연한 귀결처럼 보인다. ‘괜찮다’는 가짜 위안 대신 “나는 전혀 괜찮지 않다”고 솔직하게 외칠 수 있는 것도 용기다. 자신의 모습을 거짓 없이 바라볼 수 있을 때, 진정한 소통과 치료도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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