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리적 특징은 일찍부터 인천항을 역사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고대부터 한반도의 주요 무대로 등장한 인천항은 장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기원으로만 따지면 백제시대 능허대(현재 연수구 옥련동 해안도로 일대)에 나루를 세워 중국과 교역을 시작하기 시작한 것이 인천항의 해상교통 관문으로 등장한 첫 번째 사례다.

근대적 의미의 개항이 일어난 지난 1883년 이후만 보더라도 인천항의 역사는 한국 현대사의 역사와 다를 바 없다.

서구와의 교역을 위해 본격적으로 문을 열고 근대 항만의 모습을 갖춰 가기 시작한 인천항은 이후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전후 복구기, 1970~80년대 경제도약기를 차례로 거치며 한국 경제성장의 주요 무대이자 견인차 역할을 해 왔다.

또한 20세기 후반부터 중국 경제의 성장과 더불어 동북아시아와 황해경제권이 세계 중심으로 등장하면서 인천항은 새로운 역사적 임무를 부여받고 다시 한 번 도약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인천항만공사(사장 김춘선)가 지난 2008년 펴낸 ‘인천항사(The History of Incheon Port)’를 중심으로 인천항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인천항의 미래와 재도약을 점쳐본다.

   
 

 # 인천과 바다

인천의 운명이 바다에 달려 있다는 사실은 이미 인천의 옛 지명이 암시하고 있다.

미추홀(彌鄒忽)은 ‘물의 도시’ 혹은 ‘바닷가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옛 인천을 중심으로 경기만과 한강하구는 동아시아의 해상교통에서 지극히 중요한 장소였다.

인천지역이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는 사실은 백제 이래 대중국 교류 창구로 기능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백제가 중국과 통교하기 시작한 것은 백제가 전성기에 달한 근초고왕 때 일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는 근초고왕 27년에 중국의 진(晉)나라에 처음으로 사신을 보냈고 이듬해에도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고 한다. 백제가 이때 이용한 해상교통로는 인천을 출발해 옹진군 덕적도를 거쳐 중국의 산둥(山東)반도에 이르는 등주항로(登州航路)라고 부르는 해상 루트였다고 한다. 등주항로의 출발지점은 능허대로 알려져 있다.

 # 인천항의 침체

고려시대에 개경의 관문 역할을 하면서 발전했던 인천은 조선시대로 바뀌면서 침체 사태로 빠져들었다.

조선은 대대적으로 자급자족적인 토지경제와 대외적으로는 중국 명나라와 같이 바다를 봉쇄하는 해금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황해의 해상교통은 전면 금지됐고 귀화하지 않은 외국인들은 모두 추방당했다.

사신의 왕래와 대외무역으로 번성했던 인천지역의 항구와 포구들도 그 기능을 상실하고 평범한 농어촌으로 변해야 했다.

조선의 고려왕실 잔재 청산과 중앙집권의 강화에 맞물려 경원부는 인천군으로 격하됐으며, 강화와 부평도 군사적 의미만을 지닌 일개 도호부가 되고 말았다.

이후 200년간의 인천은 자급자족적인 농어촌사회로 존속했다. 이후 왜란과 호란을 겪은 17세기를 전후해 인천은 국방의 요충지로 떠오르며 강화도는 섬 전체가 요새화됐다.

또한 제물포는 조선 지배의 전진기지로, 나아가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삼으려는 일본의 집요한 요구를 당시의 한국 정부는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없었기 때문에 인천은 일본에 의해 물화적재의 항으로 바뀌어 제국주의의 공간으로 재편되는 길을 걷게 된다.

 # 개항과 국제항구도시로서의 재탄생

제물포는 강화도 조약에 의해 1883년(고종 20년)에 개항됐다.

이로부터 한적한 어촌이었던 제물포는 근대 식민지로, 국제항구도시로 급속히 변모해 개항되던 해 근대적 무역업무를 처리하는 감리서와 해관(지금의 세관)이 설치됐으며, 일본인과 중국인을 비롯해 각국인들의 거주지역이 획정되고 영사관들이 들어섰다.

이같이 개항되던 해 348명의 일본인이 이주해 온 이래 일본인 거주지는 1890년 1천16명으로 증가했으며, 중국인들도 상당히 많이 이주해와 인천은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추면서 1만866명의 한국인과 1만2천711명의 일본인, 2천274명의 중국인, 50여 명의 각국인들이 거주하는 다중도시였다고 한다.

이후 1907년에 이르러 인천항은 한국무역총액의 50%에 이르는 국제항으로 성장했으며, 여객과 화물 운송을 목적으로 한 연안항로(진남포·군산), 국제항로(상하이·다롄·오사카·나가사키)의 운항이 시작됐다.

일제강점기 인천은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서 중공업과 군수산업 중심으로 재편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한 해변 매립, 도로 확장, 행정구역 확대가 이뤄졌다.

이 기간 중 커다란 변화는 인천항을 드나드는 선박이 해수의 높이와 상관없이 선박 출입이 가능하게 한 이중 갑문식 선거(도크) 설비공사가 이뤄진 것이다. 이 설비공사는 1911년 착공, 1923년에 준공된 대토목

   
 

공사였다.

갑문선거는 길이 454m, 폭 318m, 선거 내 수심은 8~10m로 2천t급 기선 5척이 동시에 계류할 수 있어 인천항을 이용하는 선박이 급속히 증가했다.

 # 해방과 전쟁 이후 인천항

해방 직후 인천항은 수입항 기능이 활성화됐다. 지난 1946년에는 한국 총수입의 94%, 1948년에는 88%를 차지하는 등 압도적으로 높은 비중이었다.

또한 해방 후 생산이 위축된 상황에서도 인천은 수도 서울의 관문도시로서 각종 산업물자 조달항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으로 인해 인천항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1950년 9월 15일에 이뤄졌던 인천상륙작전의 현장으로 항만시설과 시가지가 대부분 파괴되고 항만 기능을 거의 상실하고 만다.

인천항의 재건은 1955년부터 1959년에 걸쳐 이뤄진 항만사업 5개년계획이 추진되면서 전쟁으로 파괴된 시설이 점차 복구되고, 1970년대 지정하역회사제를 실시하면서 민간기업의 부두 운영이 시작됐다.

1973년부터 1978년에 걸쳐 제1단계 인천항 개발사업으로 갑문 방파제, 항만도로 포장 등의 시설을 보완했고 1973년 내항의 제4부두에 ㈜한진 및 대한통운㈜의 민간자본을 유치해 우리나라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부두시설을 완공, 우리나라의 컨테이너화물 수출입 촉진을 선도했다.

이어 1974년 5월 제2선거가 완공됨으로써 인천항의 내항은 완전히 폐쇄형 항만이 되고 기존 내항을 입출항하던 500t급 미만의 소형 연안선박을 수용하기 위해 선거 남측에 새로 연안부두를 건설하게 됐다.

연안부두에는 410m와 240m의 남북으로 2개의 방파제를 축조하고 33만㎡의 수면적을 확보해 소형 선박 300여 척을 수용할 수 있는 잔교와 물량장을 축조했다. 이후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뤄지면서 인천의 지경학적 이점과 국제공항·경제자유구역 및 산업단지 등 인천의 양호한 여건을 활용해 인천항의 역할을 더욱 높일 수 있는 계기의 전기를 맞이했다.

 # 인천항의 재도약과 미래

지난 2005년 7월 인천항의 운영이 항만공사체제로 전환되면서 마케팅 개념이 도입돼 국내외 선사와 화주, 물류기업 등 광범위한 활동이 전개되면서 인천항 이미지를 빠른 시간에 향상시키고 있다.

   
 

현재 조성 중인 물류거점시설로 경제자유구역 및 배후물류단지, 국제물류유통시설 1천79만3천464㎡와 경제자유구역과 남부·동부·북부권에 3개 도시 물류유통시설 46만2천812㎡를 포함한 총 1천725만6천276㎡의 물류 관련 부지가 조성될 것이다.

물류거점을 연결하는 물류간선망은 인천북항·내항·남항·인천신항을 연결하는 반달 형태의 방사순환형 화물수송체계의 틀이 갖춰져 도심에서 여객과 화물의 혼재 최소화, 광역 간 화물 수송의 역할 분담, 도시 내 혼잡 감소를 통해 원활한 화물 수송과 함께 시민생활의 활력도 증진될 것으로 점쳐진다.

이같이 미래의 인천항은 배후단지를 활용해 기업과 화물유치, 항만물류에 관련한 서비스의 질과 부가가치를 높이는 인천국제공항 중심의 환상형 관광네트워크 조성, 국제해양권 관광벨트 구축, 항만기능 재배치 및 워터프런트의 개발 등 인천을 품격 높은 해양관광도시로 변모시킬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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