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국회를 시작으로 출발한 현대 정치사에서 인천은 걸출한 국회의원을 배출하며 굵직한 발자취를 남겨 왔다. 인천지역 출신으로는 제헌의원을 거쳐 국회의장을 지낸 5선의 곽상훈 전 의원부터 6선의 김은하 전 국회부의장, 지난 총선으로 5선에 성공하며 새누리당 대표로 선출된 황우여 의원까지 정치거목들이 대한민국 정치사에 중요하게 자리잡으며 현대 정치사에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30여 년 만에 재개된 지방선거에서도 인천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진정한 발전을 이뤄 내며 우리 정치사에 괄목할 모습으로 성장하고 있다. 인천지역에서 그동안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와 인천시장 선거를 중심으로 우리 현대사에 비친 인천의 정치사를 짚어본다. <편집자 주>

 # 인천 정당사
이승만 정권으로 대표되는 제1공화국(1948~1960)에서의 초기 국회는 여야로 불리는 정당 형태의 정치세력이 아닌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좌익과 우익으로 분류됐다.

▲ 제헌의회선거 당일 풍경

최초의 선거인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서 대한민국 정치사는 물론 인천의 정치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두 거목인 곽상훈과 조봉암을 만난다.

인천 갑구에서 제헌의원에 당선된 곽상훈은 대한소년단경기도연합회장 출신으로 출마 이후 내리 5선을 통해 국회의장까지 오르고 4·19 시민혁명 직후에는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도 했다.

부산 출생으로 상하이한인청년동맹과 신간회 중앙간부로 활약하며 동래기장독립운동으로 투옥되기도 한 곽 의원은 1대 선거에서 56.6%의 득표율을 기록한 이후 4대에서는 74.3%, 5대에서는 85.4%라는 경이적인 득표율을 가진 우리 정치사의 거목이다.

을구에서는 이후 이승만의 정적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우리 정치사의 거목이었던 조봉암이 좌익진영 대표로 당선됐다.

제헌의원 당선 후 이승만 정부에서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 개혁과 농업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한 조 의원은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돼 국회 부의장에 선출됐으며 이후 2대와 3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계기로 이승만의 정적이 됐다.

▲ 조봉암의 진보당 창당대회.
1956년 대통령 선거 이후 진보당을 창당해 정당활동을 펼치다 1958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돼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이듬해 처형됐는데 후대는 이를 ‘사법살인’이라 부르기도 했다. 사망한 지 52년 만인 지난해 1월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해 재조명되고 있다.

여야가 분명히 구분된 것은 전쟁을 거친 후 치러진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자유당과 민주국민당이 후보자를 공천하면서 우리나라 선거 사상 처음으로 정당 입후보자 공천제가 실시된다.

1958년 5월 2일 시행된 4대 국회의원 선거는 인천지역 갑·을·병에서 집권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이 맞붙었으나 민주당이 3개 선거구 모두를 석권하며 몰락을 코앞에 둔 이승만 자유당 정권에 일격을 가했다.

눈에 띄는 것은 2대부터 4대까지 인천에서 당선된 국회의원 9명 가운데 여당인 자유당은 2명에 불과했고 민주당 3명, 무소속 3명, 국민당 1명 등 야당이 전체 당선자의 80%에 육박하는 7명이 당선됐다는 점이다. 인천이 ‘야도(野都)’로 불리게 된 계기다.

▲ 앜한국정치는 4·19이후와 이전으로 나눠질 정도로 민중을 깨운 4·19혁명기 거리에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3·15 부정선거에 이은 4·19 시민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후 구성된 장면 정부는 4대 국회를 해산하고 양원제와 내각책임제 개헌을 단행하는 제2공화국을 선포하고 같은 해 7월 29일 5대 참의원 및 민의원 총선을 실시했다.

4대에 이어 5대에서도 인천시민은 야당인 민주당에 62.9%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며 3개 의석 전부를 몰아줬다. 이때 63세의 최고령 후보로 5선에 도전한 민주당 곽상훈 후보는 84.5%라는 경이적인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선돼 지금의 국회의장인 민의원 의장에 선출된다.

하지만 5대 국회는 채 1년도 안 돼 박정희의 5·16쿠데타로 헌정 중단과 함께 정당활동이 중단되며 마감됐고, 이어진 박정희 독재가 본격화된 3·4공화국에서 치러진 6~10대까지의 국회의원 선거는 여야의 집중 없이 골고루 표를 분산시켰다.

7대 선거에서만 인천 갑구에서 인천시장 출신으로 신민당 공천을 받은 김정렬과 역시 신민당 출신으로 재선에 도전한 김은하가 당선되며 야당이 2석을 모두 가져갔다. 다시 야도 인천의 저력을 보여 준 결과다.

10·26으로 유신이 종말을 고한 후 12·12 친위 쿠데타를 통해 권력에 다가선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광주민주화운동을 처참하게 진압하고 스스로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돼 제5공화국을 출범시킨다.

   
 
서슬퍼런 5공화국에서 치러진 총선에서도 11대의 경우 민주한국당의 정정훈과 민주정의당의 김숙현을 각각 당선시키며 여야 균형을 맞췄고, 이어진 12대 총선에서도 신한민주당과 민주정의당에 각각 2석씩 보태며 한쪽으로 몰지 않았다.

이러한 균형은 민주화시대로 접어들면서 퇴색하기 시작한다. 민주화가 진행된 노태우 정권 시절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인천은 7개 선거구 중 집권 민정당에 6석을 몰아주고 야당인 통일민주당이 북구갑에서 정정훈을 당선시키는 데 그쳤다.

이어진 14대 총선에서도 민주당은 1석을 얻는 데 그쳐 민정당에서 당명을 바꾼 민자당에 참패했고,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한 15대 총선에서도 역시 여당인 신한국당이 전체 11개 의석 가운데 9석을 석권하며 압승을 거둔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 이후 2000년에 치러진 16대 총선에서는 야당인 한나라당이 5개 의석을, 집권여당인 민주당은 6개 의석을 차지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야당 주도 국회에서 탄핵된 후 치러진 17대 총선에서는 탄핵역풍이 한나라당을 향하며 인천지역 12개 선거구 중 한나라당은 단 3석을 얻는 데 그쳤고, 18대 총선에서는 전세 역전으로 노무현 책임론이 부각되며 민주당은 2석만 확보했을 뿐이다.

   
 

이명박 대통령 말기에 치러진 19대 총선에서는 한나라당에서 이름을 바꾼 새누리당의 참패가 예상됐으나 야당의 후보 공천 실패와 유력 대선후보인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의 지원유세에 힘입은 새누리당의 약진으로 12석 중 절반인 6석을 차지하며 연말 대선정국을 유리하게 이끌게 됐다.

 # 풀뿌리 민주주의, 지방자치시대
한국에서의 지방자치제도는 1952년 4월 시행된 ‘시·읍·면 의회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2010년 제5회 지방선거까지 16회에 걸쳐 시행됐다.
1960년 이전까지는 시민이 참여하는 직접선거가 아닌 시의회 의원들의 간접선거를 통해 진행되다 4·19혁명 이후 모든 단체장이 민선에 의해 이뤄졌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 이후 지방의회는 해산되고 그 후 30여 년간 중단됐다가 1991년 6월에 이르러 지방의원 선거가 다시 실시됐고 1995년 6월에는 광역단체장 및 광역의원, 기초단체장 및 기초의원을 동시에 선출하면서 한국에서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에 들어가게 됐다.

1995년 6·27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된 이후 2010년까지 5회가 실시됐다.

   
 
그동안 인천에서 배출한 인천시장은 모두 29명이다.

정부 수립 이전에 이미 미군정은 일본 패전 이후의 국내에서의 혼란과 불안한 민심을 조기에 수습하기 위해 한국인 행정책임자로 지금의 인천시장 격인 부윤(府尹)을 간접선거로 선출하도록 했다.

초대 인천부윤에는 우익계에서 장광순과 김세원·임홍재, 좌익계에서는 조봉암과 박남칠·이승엽·김용규 등 모두 7명이 후보로 나섰으나 인천정회장연합회에서 투표를 통해 임홍재를 초대 인천부윤으로 선출했다.

미군정이 끝나고 정부 수립을 통해 만들어진 지방자치법에 따라 1952년 5월 7일 소집된 지방의회에서 간접선거를 통해 표양문을 인천시장으로 선출해 초대 시장으로 불리고 있다.

표양문은 비록 직접선거가 아닌 간접선거를 통해 선출됐지만 시민대표인 시의원들이 선출했다는 점에서 최초의 민선시장이다.

4·19혁명이 일어난 1960년에 지방자치법 개정을 통해 그해 12월 26일 김진두 시장이 최초의 시민 참여 직접선거로 4대 시장에 선출됐으나 1년도 채우지 못하고 5·16 군사쿠데타로 막을 내렸다.

이후 5대 시장부터 1995년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재개될 때까지 임명제 시장이 인천시장 자리를 채웠고, 그 자리 대부분은 대통령이나 권력핵심부에 의해 임명됐다.

   
 

5대 시장으로 임명된 유승원은 5·16 군사쿠데타에 참여했다 김진두 후임 시장으로 재직했으며 1963년 사퇴하고 곧이어 치러진 6대 총선에 공화당 공천으로 당선됐다.

이렇게 임명된 관선 인천시장이 1995년까지 20명에 달했고 권력 핵심의 대표적인 관선시장은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1993년 3월부터 1994년 9월까지 인천시장으로 재직하다 1995년 6월 실시된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초대 민선인천시장에 당선된 최기선 시장이다.

민선시장은 최 시장이 재선에 성공한 이후 2002년 한나라당의 안상수 후보가 당선됐고 역시 2006년 재선에 성공하며 3·4대 민선시장에 이름을 올렸다.

2010년은 인천정치사는 물론 야당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일어난다.

민주당 수석최고위원으로 3선에 성공하며 중견 정치인으로 성장한 송영길 후보가 3선 고지에 나선 안상수 시장에게 도전장을 던져 큰 표차로 민선5대 시장으로 당선된 것이다.
이 선거에서 인천지역 10개 군·구에서 8곳의 단체장을 야당이 석권했다. 이는 뿔뿔이 흩어진 야당이 후보단일화를 이루면서 일궈 낸 결과물로, 8개 기초단체장 가운데 동구와 남동구는 민주노동당 후보가 당선되는 이변을 낳으며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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