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관문이었던 인천은 외국 문물의 유입과 더불어 우리나라 언론사의 시발지였다고 할 만큼 신문 태동기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천지역 언론사들은 그동안 중앙집권 정치 행태로 중앙지들의 세력에 밀려 부침을 계속해 왔지만 일찍이 1890년 1월 28일 ‘인천경성격주상보’가 발행되는 등 우리나라 신문사의 중심에 있었다.

이에 본보 지령 7000호를 맞아 인천언론의 역사를 인천언론인클럽에서 발행한 ‘인천언론사’를 통해 재조명해 본다.

 # 인천언론의 태동

인천경성격주상보는 일본인들 손에, 일본어로 발행된 것이기는 했지만 일찍이 인천에서 신문이 발행됐다

   
 
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비록 신문 본래의 사명과 역할을 하기보다는 일본의 조선 강점과 지배 논리를 공고히 하는 앞잡이 구실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런 시련 속에서 인천지역 지식인들은 다른 지방에 비해 먼저 언론정신과 사상을 깨우친 선구자적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인천경성격주상보의 뒤를 이어 1891년 9월 1일 ‘조선순보’가 창간됐고, 이후 인천에는 조선신보(1892)→조선타임즈(1907)→조선신문(1908)→인천신보(1921) 등의 순으로 일제강점기에 발행됐었다.

 # 광복 이후 인천언론

1945년 10월 7일 광복 이후 좌·우익의 혼란 속에서 인천의 실업가들과 문인들이 중심이 돼 향토지 발간을 기획하면서 ‘대중일보’가 탄생했다.

5개월 뒤인 1946년 3월 1일 또 하나의 신문인 인천신문이 인천에서 태어난다.

인천신문은 대중일보 창간 때 참여했던 편집국장과 일부 기자들이 별도의 신문을 창간한 신문이다.

인천신문의 창간은 당시 인천이 좌익의 강세를 보인 지역으로 진보 색채가 강했던 편집진과 경영진의 뜻이 맞지 않아 대중일보를 나와 창간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 인천언론의 정립

1953년 휴전을 전후해 인천에는 여러 개의 신문이 탄생과 소멸을 거듭하며 나름의 경쟁 속에서 활동을 펼친다.

   
 
이러한 면에서는 인천이 서울보다 더 많은 활동을 펼쳤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인천언론은 인천신보-인천일보-주간인천을 중심으로 여론을 형성해 나갔다.

인천신보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면서 서울로 진격해 가자 그해 9월 15일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신문 발행 허가를 얻어내 19일 대중일보의 시설과 인원을 중심으로 인천신보를 창간한다.

이후 인천신보는 기호일보로 제호를 변경한 뒤 1960년 7월 7일 경기매일신문으로 또 제호를 바꾼다.

인천일보는 1952년 8월 1일 태어난다. 이 신문은 1953년 창간 1주년을 맞아 지면을 배대판으로 확대하고 자체 인쇄 시설을 갖추는 등 나름의 의욕적인 활동을 펼치며 인천신보와 경쟁을 해 나갔다.

주간인천은 비록 주간지지만 기라성 같은 언론인들이 포진, 일간지 못지않은 위력을 보이며 신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신문을 중심으로 인천에서 내로라하는 언론인들이 모였고 이곳에서 자라 인천신문-경기연합일보-연합신문-경기신문으로 이어나간다.

이후 인천언론계는 1960년대 다시 한 번 변화를 겪게 된다. 1960년 8월 15일 인천신문이 새로 창간되고 1966년 2월 22일 경기일보가 태어난다.

당시 인천언론 상황에 대해 원로 언론인인 유덕택 전 인천일보 회장은 “1940~50년대 대중일보-인천신문-인천일보의 트로이카 경쟁 시대에서 다시 1960년대에 인천신문-경기매일신문(전 인천신보)에서 경기일보가 창간하면서 새로운 경쟁체제가 형성됐다”고 회상했다.

 # 혼란의 60년대 언론

1960년 4·19혁명 이후 사회 혼란은 극에 달한다.

4월 혁명을 계기로 들어선 장면 총리 정부는 같은 해 6월 15일 제2공화국 헌법을 통과시켰다.

당시 헌법은 언론·출판의 자유 보장에 대한 헌법 제13조 1항에 따라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받지 아니한다.’라고 개정됐다.

하지만 이 헌법은 언론 자유를 보장했지만 당시의 사회적 능력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어서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대부분 준비 없이 이름만 내건 실속 없는 신문, 잡지들에서 사이비 기자를 양산하는 계기가 됐고 일명 ‘4·19기자’라는 별칭을 만들어 내기까지 한다.

이 같은 지나친 자유가 사회질서와 국가기강마저 무너뜨려 혼란이 극에 달하면서 결국 5·16 군사정권의 등장을 불러오고 만다.

그리고 이후 박정희 정권의 1972년 유신체제가 선포되고 이듬해 9월 1일, 지방 일간신문은 1도(道)-1사(社)로 통합되게 된다. 인천의 경기일보와 경기매일신문이 폐간되고 수원의 연합신문으로 통합됨으로써 인천은 15년 동안 신문사 없는 지역이 된다.

통합 전 상황에 대해 김창수 전 기호일보 편집국장은 “기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살아남느냐가 관심의 대상이었고, 폐간을 한 달여 남겨 놓고는 신문 만들 생각들은 거의 하지 않았다”고 소회했다.

# 통폐합 이후 탄생한 풀뿌리 언론, ‘경기교육신보’

   
 
인천에 뿌리를 둔 신문이 하나도 없는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몸부림들이 있어 왔다. 잡지를 발간해 이를 대신해 보려고 애쓰기도 했고 주간지를 창간해 인천의 소식을 전하려고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런 시도 속에서 1975년 10월 10일 태어난 게 경기교육신보이다.

이때는 일체 신문·잡지 발행을 허가해 주지 않던 시절이라 특수 주간지라는 이름을 앞세우긴 했지만 언론인들에게는 ‘큰일’을 이룬 역사적인 날이다. 언론 통폐합 이후 신문잡지로는 처음 창간하는 기록을 갖게 된 것이다.

 # 80년대 후반 인천의 언론

1987년 6월 29일은 한국 언론사에도 획기적인 사건이다. 3사 통합으로 신문이 없던 인천으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1987년 10월 14일 ‘경인일보사’ 임시 주주총회에서 인천지역 주주들이 인천지역에 새로운 신문사 설립을 제안한다.

이후 인천 주주들은 공보처의 등록 인가를 받고 마침내 7월 15일 인천신문(현 인천일보) 창간호를 발행한다.

이와 닷새 차이로 기호신문(현 기호일보)가 태어나 인천언론 공백 15년이란 긴 암흑의 터널을 뚫고 횃불을 높이 들어 올린다.

   
 

당시 기호일보는 창간사에서 “서해의 지평을 열고 불어오는 갈바람과 파도와 뱃고동이 어우러져 연주하는 바다의 교향곡에 발맞추어 기호지방 1천만 애독자의 축복을 받으면서 새 시대의 총아 기호신문이 태어났다”고 밝힌다.

제호가 말한 것처럼 수도권(옛 기호지역)을 중심으로 경인지역의 중추적인 언론으로 소명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천명한 것이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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