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역사자료관은

오욕의 세월부터 부흥, 현재의 모습까지 인천의 모든 역사가 집적돼 있는 인천역사자료관.
상당수 사람들이 ‘역사’라고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만 인천역사자료관은 인천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어 생각보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인천역사자료관은 인천의 역사자료를 발굴하고 수집·정리해 책을 발간하는 기관으로 두 명의 역사학 전문가가 대부분의 업무를 도맡고 있다.

인천의 역사적 자료를 발굴하고 축적하기 위해 생겨난 뒤 지금까지 발간된 책자만 수십 권에 달한다.

한자와 일어·영어로 된 학술자료를 번역하고 옛 고서를 번역해 인용하기 쉽도록 한 책자를 발간키도 한다.

또 시민들에게 자칫 외면받을 수 있는 딱딱한 주제인 역사를 보다 알기 쉽고 재미있게 알리기 위해 인천지역 설화를 묶은 책자와 송도 갯벌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서책도 발간하고 있다.

인천역사자료관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사업가의 저택이었으며, 광복 이후에는 ‘동양장’이라는 서구식 레스토랑과 ‘송학장’이라는 사교클럽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 인천시가 매입, 1966년 한옥 건물로 개축한 뒤 시장 관사로 사용됐다.

더 이상 시장 관사가 필요없게 된 2001년 10월, 이곳은 비로소 역사자료관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상당수 지방자치단체장들의 관사가 어린이집 등으로 사용된 데 반해 인천의 역사를 축적할 수 있는 귀중한 공간으로 활용된 좋은 선례로 남기도 했다.

인천역사자료관에는 인천지역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역사를 담은 5천여 권에 달하는 책자와 수많은 역사자료가 보관돼 있다.

특히 시민들에게 인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인천향토사 강좌를 개설, 진행하기도 한다.

인천역사자료관 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 강옥엽(52·여)박사는 “인천역사자료관은 한마디로 인천의 역사를 집적하는 곳”이라며 “자료를 발굴하고 수집·정리한 다음 책자 등으로 발간해 시민들에게 알리는 기구”라고 설명했다.

  # 인천역사자료관을 통해 알아본 인천 역사

‘인천의 근대사가 곧 한국의 근대사’라고 표현될 만큼 시대적 전환기에 일어났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인천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인천은 중구를 중심으로 일본식 건축물과 차이나타운 등 현재까지도 근대문화의 산실로 자리하고 있으며 인천이 갖는 지리적·입지적 중요성은 역사적으로 ‘선구지’가 될 수밖에 없는 요인이기도 하다.

1883년 개항 이후 인천항은 전세계 각국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그들만의 거류지가 생겨났고 일본·청국·각국 공동조계가 차례로 조성되면서 자의든 타의든 국제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특히 해관, 외국인 상사, 은행, 서구식 주택, 공원, 호텔, 경인철도, 갑문식 도크 등 생활편의를 위한 각종 근대문물과 사회시설 등이 최초로 도입, 조성됐다.

근대식 관세를 총괄했던 인천해관이 1883년 6월 16일 최초로 문을 열자 이화양행을 필두로 세창양행, 타운센드상회 등 서구 무역상사가 진출했으며 이들을 위한 주거시설이 만들어졌다.

세창양행은 함부르크에서 온 사원을 위해 현 자유공원 맥아더동상 부근에 최초의 서구식 주택인 기숙사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1888년에는 한 러시아 측량기사 설계로 최초의 서구식 공원도 조성됐는데, 이 ‘Public Garden’이 각국인 공동의 휴식처로 기능하면서 ‘각국공원’, ‘만국공원’이라는 명칭으로 더 알려지게 됐으며 지금의 자유공원이 그곳이다.

이국 땅에서의 영원한 안식처였을 외국인 묘지도 각국 조계 획정과 함께 마련됐다.

1883년 7월 최초의 매장이 있었던 이 묘지에는 의료 선교사였던 랜디스, 인천해관의 오례당, 세창양행의 헤르만 헨켈, 타운센드상회의 월터 타운센드 등 개항기 인천과 인연을 맺었던 인물 등의 묘 66기가 남아 있다.

또 개항과 함께 인천에는 구미 각국의 외교사절, 선교사, 여행객들이 입항했다.

특히 서양인을 상대로 하는 근대적 숙박시설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호텔 수요가 발생, 처음으로 만들어진 호텔이 1888년 세워진 대불호텔이다. 이 호텔은 1902년 세워진 서울 중구 정동의 손탁호텔보다도 4년 앞서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다.

이 외에도 인천에는 성냥공장, 서구식 사립 초등교육기관, 팔미도 등대, 천일염전, 월미도 조탕 등에 이르기까지 ‘한국 최초’에 해당되는 많은 문화가 형성됐다.

인천은 근대 개항장으로, 타 지역보다 훨씬 앞서는 역사적 내용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근대문화의 수용은 일본의 요구에 의해 개항한 인천항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인천의 개항은 고종 20년(1883) 1월에 큰 논란 속에 이뤄졌다.

인천 제물포가 개항되자 중국과 서양 여러 나라들도 속속 이곳으로 밀려들었다. 그 결과 인천은 근대문화 수용의 중심지, 선구자 역할을 하며 최고·최초의 문화들이 생겨나는 곳으로 발전하게 된다.

개항 이후 인천은 일본 거주지, 청국 거주지, 영국 영사관 등 열강의 각축장인 동시에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한 조선에서 인천은 러·일전쟁 당시 인천해전의 장소로 청·일전쟁의 병참기지로 전락하는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개항과 동시에 각 개항장에는 외국인 거류지라고 불리는 구역이 설정됐다.

   
 

1883년 일본과 체결한 조선국인천항구조계약서에 의해 처음으로 인천에 일본조계지가 생겼다.

일본조계는 현재 자유공원 남쪽의 관동·중앙동 일대 2만3천100㎡(약 7천 평)였고, 청국조계는 선린동 일대 1만6천500㎡(약 5천 평)였다. 현재 중구 차이나타운의 시초가 되는 곳이다.

미국·영국·독일 등 주로 서구인들이 거주하려 했던 각국 조계는 청국조계와 일본조계를 감싸 안은 모습으로 47만5천200㎡(14만 평)에 달했다. 지역은 현재의 자유공원과 송학동 일대였다.

이곳에는 일본우선회사와 오사카상선회사가 있는데, 이들 회사는 일본과 조선, 조선을 경유한 중국 노선을 확보하고 있다.

일본제일은행은 매우 단단한 건물을 이곳에 세웠는데 엄청난 은행 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일본 제18은행과 제58일본국립은행도 이곳에 세워져 있다.(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 인천개항장역사기행 참조).
중구 신생동 주변에는 술집과 유곽 등 유흥업소가 생겨나고 영사관 안에 우편이 개설됐다. 오늘의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자리에 인천신사가 들어선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후 인천은 광복 후 1949년 8월 15일 지방자치제가 실시됨에 따라 시로 승격, 1968년 1월 1일을 기해 중구·동구·남구·북구 등 4개 구가 설치됐다.

▲ 강옥엽 박사
1981년 7월 직할시로 승격된 뒤 1988년 1월 1일 서구·남동구가 증설됐으며, 1989년 1월 1일에는 김포군 계양면·검단면과 옹진군 용유면·영종면이 편입됐고, 1995년 3월 1일 연수구·계양구가 증설되며 경기도 강화군과 옹진군이 편입되는 등 현재의 인천광역시(2개 군·8개 구)가 있게 됐다.

인천역사자료관 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 강옥엽 박사는 “인천의 고대·중세사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찬란하고 의미있는 사건과 인물이 많다”며 “선사 이전, 백제사, 고려사, 근대 개항사를 이어오고 있는 인천은 우리 국가의 개척지와 선구자 역할을 해 왔다”고 평가했다.

그는 “인천의 역사적 특징을 정립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이는 인천역사자료관뿐만 아니라 시민 모두의 의무”라고 덧붙였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