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 생명을 얻어 태어나는 것이 그렇다. 자신의 의지로 태어난 이는 아무도 없다. 죽음도 이와 같다. 주어진 삶의 주기를 살다가 자연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일 또한 스스로의 결정권을 벗어난 일이다. 세상 만물은 자연의 섭리 속에서 생과 사를 맞이하고 우리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순리에서 벗어난 결정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자살은 이미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고 이와 함께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무엇이 생을 마감하도록 이끈 것일까? 자살을 선택한 이유를 일반화 할 수는 없겠지만 살아 있음에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때 죽음은 가깝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반대로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면 유의미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소개 할 영화 ‘죽어야 할 때’는 아흔을 넘긴 노부인의 마지막 인생을 통해 삶의 이유를 반추하는 작품이다.  

낡은 저택에서 유일한 말동무이자 친구인 충견 ‘필라’와 함께 살고 있는 아니엘라 할머니. 아흔이 넘는 세월동안 할머니 곁에 남은 건 자신만큼이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낡은 물건들뿐이다. 가끔씩 걸려오는 아들의 전화와 방문은 그녀의 기쁨이자 오랜 기다림이다.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할머니는 눈을 감고 아름다웠던 옛 시절들을 추억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자신의 유년시절, 사랑하는 남편과의 만남, 결혼 그리고 아들. 마치 손에 잡힐 듯 그 시절의 기억들이 생생하다. 하지만 눈을 뜨면 추억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반짝거렸던 과거와는 달리 자신 앞에 놓인 현실은 적막하다. 이웃집 음악원생들이 자신의 정원으로 넘나들며 소란을 피우는 모습은 성가시기만 하다. 할머니가 나타나면 아이들은 우르르 도망가며 겁을 낸다. 사람들에게 그녀는 괴팍하고 고집 센 노인으로만 비춰질 뿐이다. 사랑으로 키웠던 아들 또한 자신을 멀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함께 들어와 살길 바라는 자신의 희망과는 달리 아들은 비싼 값에 집을 처분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에 실망한 그녀는 살아갈 이유를 상실한다. 아침에 눈을 뜬 할머니는 집을 치운 후 검은 상복으로 갈아입는다. 그리고 침대 위에 누워 “이제는 죽어야 할 때“라고 혼잣말을 하며 눈을 감는다. 그렇게 한참을 누워있던 아니엘라 할머니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충견 필라에게 아침을 챙겨주고 정원을 가로질러 이웃의 음악원으로 향한다. 실망감에 젖어 마무리 될 뻔 했던 자신의 마지막 삶을 그녀는 새롭게 준비한다. 자신은 떠나더라도 남겨질 모든 것들이 좀 더 의미 있게 사용되도록, 그리고 자신을 닮은 오래된 저택이 사라지지 않도록 아니엘라 할머니는 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 한 후 따뜻한 오후의 햇살아래 눈을 감는다.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그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며 행복해 한다. 따라서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혼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누구에게도 폐가 되지 않으려 했던 마음은 오히려 할머니를 세상과 단절시켰고 아들만이 기쁨이고 희망이자 삶의 모든 것이 될 만큼 할머니의 세상은 작아져 버렸다. 하지만 문을 열고 자신만의 성 밖으로 나간 할머니는 자신이 받을 수 있는 도움은 받고 또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도 펼쳐놓으며 주변과 다시 관계 맺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남은여생은 고독과 쓸쓸함 대신 전에 없던 활기와 충족감으로 채워지게 된다. 영화 ‘죽어야 할 때’는 모노드라마 형식에 가깝게 노부인의 일상을 잔잔하게 담아낸 작품으로 고요하고 아름다운 영상 속에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 서정시처럼 그려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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