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는 자신의 27번째 작품인 ‘란(亂)’을 통해 인류에게 보내는 유언, 마지막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왕’을 각색해 영화화한 이 작품은 인간의 폭력성과 전쟁, 그리고 몰락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나약함 등을 비관주의적 시선을 통해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75세의 노감독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는 환멸스러운 사회와 인간에 대한 비관만으로 채워진 것은 아니다.

 비록 그 빛은 희미하지만 구원과 희망의 길 또한 열어 두고 있다. 가상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 시대극 영화 ‘란’을 통해 거장 감독이 남긴 유언을 만나보자.

막강한 재산과 군대를 거느린 성주 히데토라는 사냥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던 중 따뜻한 햇살 아래 잠이 들어 버린다. 혈혈단신으로 광야에서 방황하는 꿈을 꾼 히데토라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세 아들을 불러 모은다. 70의 노인이 된 그는 장성한 아들들을 보며 자신의 은퇴를 선언한다.

그는 장남인 큰아들에게 자신의 지위와 권력 대부분을 물려주고 나머지 두 아들에게도 일정 부분의 재산과 지위를 부여해 준다. 그리고 자신은 성주로서 또한 아버지로서의 지위와 명예만을 남겨 두겠노라고 선언한다. 그는 이것으로 평화가 지속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막내아들 사부로는 이런 아버지의 결정으로 아들 간의 다툼이 커져 파국으로 치닫게 될 거라는 걱정을 쏟아낸다.

이러한 발언에 격노한 히데토라는 막내아들을 자신의 영지에서 쫓아내고 부자의 연을 끊어 버린다.

그러나 막내아들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가업의 승계를 기념하는 큰아들 타로의 연회에서 모욕을 당한 히데토라는 마음에 상처를 입고 둘째 아들을 찾아가지만 둘째 역시 아버지를 욕보인다. 결국 두 아들의 협공과 곳곳에 숨어 있는 음모로 인해 위기에 처한 히데토라는 끔찍한 배신감과 충격으로 광인이 돼 버린다. 그러나 멀리서 비극적인 소식을 접한 막내 사부로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들어가 아버지를 구해낸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용서와 속죄 그리고 화해를 나누지도 못한 채 이들 역시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 ‘란’은 불행의 예지몽과도 같은 히데토라의 꿈으로부터 출발해 결국 한 가족, 그리고 한 도시의 비극적인 파멸의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그 불행의 씨앗은 히데토라가 부와 권력을 획득한 방법인 양육강식의 폭력에 기인하고 있다. 결국 그는 자신이 늙어 약자가 된 순간, 그가 행했던 과거의 업보를 고스란히 짊어지게 된다.

게다가 이 노장 감독은 이런 비극은 신 혹은 부처에 의해서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냉정한 어조로 전하고 있다. 탐욕에 의해 선(善)과 정의가 나락으로 떨어진 상황에서 그 어떤 신도 비극을 자처한 인간을 구원해 줄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자신의 업보는 스스로 짊어지고 가야 하는 숙명인 것이다.

 인간사의 모든 비극과 끔찍한 고통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냈다는 결론은 그의 작품 대부분을 관통하는 결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을 포함한 그의 영화가 인간에 대한 환멸과 비관주의적 시선에 마침표를 찍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우리가 만들어 낸 이 무시무시한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비극을 뛰어넘기를 바라고 있다.

직면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첫 단계로 감독은 막막함과 절망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상황을 개선시킬 방안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구로사와 감독은 비극과 뒤늦은 깨달음 속에서 진정한 희망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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