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형상을 보여 주는 이미지와 내용을 담은 서사로 이뤄져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보는 영화나 TV 드라마를 포함한 대부분의 영상은 이야기의 전개를 도와주는 형식으로 이미지가 보여져 왔다.

 그러나 오늘 소개하려는 알랭 레네 감독의 1959년 작품 ‘히로시마 내 사랑’은 시각적 이미지들이 이야기를 구축해 가는 새로운 방식의 영화 보기를 제안한 작품이다.

여자 주인공의 회상에 따라 현재와 과거가 교차되면서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 변화를 가져온 이 작품은 칸영화제 상영 당시 관객과 평단의 열렬한 호응을 받은 바 있다. 1959년은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과거의 시간이다. 그리고 이 영화 또한 과거의 작품이다. 그러나 서사 중심이 아닌 이미지 중심으로 영상을 구축해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선사하는 방식의 우리에게 여전히 낯설고 새롭다.

이 영화의 표면적인 줄거리는 사랑이다. 프랑스인 여성과 일본인 남성이 히로시마에서 만나 채 이틀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서로를 알아간다.

프랑스인 여성은 영화 촬영차 일본에 온 낯선 이방인이지만 그녀에게 일본, 그 중에서 특히 영화 촬영지인 히로시마는 낯설지 않은 공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아픈 상처를 안고 있는 공간 히로시마는 그녀의 고향 느베르와 같은 느낌의 도시이다.

 그녀는 프랑스의 작은 시골마을 느베르에서 태어났고 성장했다. 그리고 스무 살 즈음 한 남성과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 사랑은 그녀의 가족뿐만 아니라 마을 공동체에서조차 허락할 수 없는 만남이었다. 2차 대전 당시 적국의 군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군인은 마을 사람들에게 잡혀 처형되고, 그녀 또한 사람들 앞에서 머리를 잘리는 수모를 받으며 지하실에 감금된다. 그녀에게 고향 느베르는 전쟁이 만든 비극적인 사랑의 공간으로 기억 속에 자리잡게 된다. 원자폭탄이 터진 히로시마는 2차 대전을 통해 아픔을 경험한 도시이다. 바로 이런 점이 그녀로 하여금 히로시마라는 도시에 특별한 연민을 느끼게 하는 이유로 자리잡는다.

15년의 시간이 흘려 30대 중반의 나이로 연민의 도시 히로시마를 찾은 여성은 뜻밖에도 일본을 떠나기 이틀 전에 한 남자를 만나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잊고 지냈던 과거의 상처를 기억해 간다.

 촬영 이후로도 히로시마에 남아 자신과 함께 머물길 바라는 남자의 간청이 깊어질수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해갈수록 그녀는 과거의 상처에 매몰되듯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려 간다. 두 사람의 관계가 갈등으로 치달을수록 여자의 기억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무차별적으로 넘나들며 시간의 합리적 경계를 무너트린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일직선 위로 올려둔다.

 어느덧 비극적인 첫사랑에 대한 그녀의 기억은 현재 만나고 있는 일본인 남성과의 사랑과 중첩되며 하나로 연결된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그녀는 자신의 아픔을 닮은 도시에서 위안을 얻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히로시마 원폭의 기억은 15년의 세월 속에 이미 도심에서는 사라져 버렸다. 그 아픔은 박물관을 통해서만 겨우 기억될 뿐, 도심의 낮과 밤은 화려한 네온 불빛과 유창한 영어식 간판들로 즐비해 있었다.

비록 치유될 수 없는 아픔과 기억을 간직한 사람들이 어디선가 신음하며 살아가겠지만, 삶은 다시 새로운 생명을 피워내고 사람들은 망각 속에 아픔을 묻어버린다.

그녀에게 히로시마는 느베르가 될 수 없었다. 일본인 남성이 독일군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비록 히로시마는 느베르의 아픔을 덮을 수는 없었지만 히로시마 그 자체가 또 다른 사랑의 이름이 돼 그녀의 기억 속에 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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