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과 위치 그리고 관계에 따라 우리의 모습은 다양하고 그에 맞는 이름으로 불린다.

누군가의 아버지로, 아들로, 남편으로, 직장 상사이자 후배로, 재미있는 친구로, 무서운 선배로, 잘 모르는 옆집 아저씨로, 또 누군가에겐 잊지 못할 옛 사랑의 이름이자 그리운 얼굴로.

한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에 따라 그는 모두 다른 이름으로 남게 된다.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그 사람과 관계 맺은 단면과의 피상적인 만남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부모·자식 간에도 그 이름 밖의 모습은 보지 못한 채 살아가는 피상적인 만남의 예외가 아닐 수도 있다. 오늘 소개할 작품 ‘마르셀의 여름’에서 소년 마르셀에게 아버지는 단 하나의 모습으로만 인식되고 있었다. 어느 여름, 시골 별장으로 휴가를 떠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소년 마르셀에게 부모님은 언제나 자랑스러운 영웅과도 같은 존재였다.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다정하신 어머니와 백과사전보다 더 똑똑한 아버지. 마르셀에게 학교 선생님인 아버지는 단연코 최고의 우상이었다.

여름방학이 오고 마르셀의 가족은 이모네 가족과 함께 도심을 벗어나 시골 별장으로 휴가를 떠난다. 그 여름의 시간은 그간 마르셀이 보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 새로움은 놀라운 대자연의 풍광만은 아니었다. 아버지에 대해서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새로운 모습의 아버지를 만나는 과정은 마르셀에게 전혀 유쾌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교사라는 직업으로 도시에서 봤던 아버지와는 달리 시골에서의 모습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책에서 비롯된 아버지의 지식이 시골에서는 딱히 유용하지 않았다. 자신의 아버지보다 매사에 어설퍼 보였던 이모부조차도 시골에서는 아버지보다 위풍당당해 보였다.

사냥에 대해 어린 자신만큼이나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와는 달리 이모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게다가 새로 사귄 시골 친구조차도 자연의 섭리에 대해서는 아버지보다 뛰어난 통찰을 보여 줬다. 자신의 우상이던 아버지가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진 마르셀은 결국 어머니 앞에서 펑펑 눈물을 쏟아낸다.

그러나 그 시간을 통해 마르셀은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맹목적인 환상에서 벗어나게 된다. 모든 일에 있어 완벽했던, 어쩌면 완벽해야만 했던 아버지도 때론 어설프고 모순적이기도 한 평범한 사람이란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아버지의 인간적인 모습이 처음에는 무척이나 실망스러웠던 마르셀이었지만 환상이 걷힌 자리에 서 있는 아버지에게서 영웅을 선망했던 느낌과는 다른 보다 인간적인 느낌으로 소년은 아버지를 사랑하게 된다.

영화 ‘마르셀의 여름’은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시인으로도 활동하는 영화감독 마르셀 파뇰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마르셀은 아버지를 포함한 어른들의 모습이 완전하지 못한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고 조금은 실망하면서 그 과정을 통해 서로의 부족한 부분도 한 사람의 모습으로 인정해 가며 사랑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과정은 그 사람의 부족하고 어리석은 모습을 단점으로 보기보단, 인정과 이해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의 참모습에 가깝게 다가가는 노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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