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는 동양 문화권에서 낯설지 않은 개념이다. 불교 교리인 윤회는 이 생이 끝난 후 그 업(業)에 따라서 다른 생에서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윤회 사상에는 육도윤회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여섯 가지의 세상에 번갈아 태어나고 죽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회의 순환은 인간이 현세에서 저지른 업에 따라 반복된다. 이는 철저하게 스스로 지은 대로 받는다는 자업자득에 기초를 두고 있다. 착한 일을 했으면 착한 결과를 받고, 악한 일을 했으면 악한 결과를 받는 것이다.

스스로 지은 죄는 피할 수도 없고 누가 대신 받을 수도 없다. 오직 자기가 지은 업의 결과에 따라서 윤회의 순환은 결정된다. 때문에 이는 인간의 자각이 중요하다. 악의 업보를 끊고 선을 행한다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서사의 기저에는 윤회사상에 깔려 있다.

시공을 가로지르는 6개의 에피소드들 속에는 같은 인물들이 태어나고 죽으면서 인연과 악연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 1849년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배를 탄 변호사 어윙은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된다.

그는 의사의 치료로 생명을 유지하지만 사실 그 의사는 오히려 어윙의 상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었다.

 금괴에 눈이 멀어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의사의 손에서 과연 어윙은 살아날 수 있을까? 1936년 작곡가 프로비셔는 방탕한 생활로 곤경에 처한다.

가족의 재정적 지원도 끊긴 상태에서 그는 당대의 유명 작곡가의 비서로 취업하며 자신의 곡을 완성시켜 나간다. 그러나 저작권에 대한 갈등으로 프로비셔는 비극적인 최후를 향해 치닫게 된다.

1974년 열혈 여기자 레이는 미래 에너지로 각광받고 있는 핵발전소의 거대 음모를 잠입 취재하던 중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다. 2012년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출판업자는 주변의 음모로 빚더미에 앉게 되는 것에 더해 악질 요양원에 갇히게 된다.

탈주를 위한 필사의 몸부림은 계속되지만 번번이 좌절을 맛본다. 2144년, 인간과 그들을 위한 복제인간이 살아가는 미래 도시 서울. 노예제도가 부활한 미래 도시엔 복제인간에 대한 존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반기를 든 복제인간 손미.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억압적인 사회에 맞서 싸운다. 2346년 인간의 탐욕으로 멸망한 지구 문명. 남은 사람들은 더 이상의 폭력과 파멸이 없는 세상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를 희망한다.

“우리 삶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타인들과 묶여 있고, 과거를 지나 현재를 살며, 우리가 저지른 악행과 우리가 베푸는 선행이 미래를 탄생시킨다.” 2144년 복제인간 손미의 입을 빌려 말하는 이 대사는 영화가 주고자 한 메시지이다.

너와 나의 연결, 과거와 현재 미래의 연결, 악행과 악행의 연결. 대략 500년에 걸쳐 펼쳐지는 장대한 이야기는 이 연결에 주목하며 모든 연결의 고리는 결국 자기 자신이 만든 업에서 비롯됐다는 윤회사상을 내비치고 있다. 그러나 윤회의 자업자득은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 악행의 결과는 자신의 책임으로 돌아오듯 선행의 결과도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게 돼 있다.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바로 그런 권선징악의 보편적인 메시지를 불교의 윤회와 자업자득의 교리로 끌고 나간 작품이라 하겠다. 그러나 불교의 윤회는 순환이 끝이 아니다.

열반(니르바나)의 차원으로까지 확장돼 있다. 번뇌와 고민, 탐욕과 어리석음으로부터의 해탈. 번뇌의 불꽃이 꺼지고, 깨달음의 지혜가 완성된 경지인 열반이야말로 윤회의 종착지이자 진정한 깨달음의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 있어서 이 영화는 업보의 수준에 머물러 끊임없이 반복하는 차원에서 순환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결과를 책임지는 연결고리의 핵심은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아쉬움 없이 전달한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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