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깔린 평일 늦은 오후 대학로. 머리 희끗한 양복 차림의 노인 한 명이 화려한 불빛 속 젊은 인파 행렬에 동참한다. 공원 벤치로 향하는가 싶던 그의 발걸음은 비좁은 소극장 입구에서 멈춘다.

커피 한 잔에 조용히 숨을 고르고 객석으로 들어서려 하자 티켓을 확인하는 직원도, 주위 관객들도 사연이 궁금한지 무심한 척 시선을 보낸다.

노인은 대학로에 청춘을 묻었다. 30년 이상 매주 4~5번은 혜화동을 찾았다. 지금도 해질 무렵이면 저녁 식사를 미루고 직장이 있는 의정부에서부터 홀로 길을 재촉한다.

공연을 자주 볼 수 있어 대학로 근처에 집을 얻었다면서 황혼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는 이 노신사는 마지막 관선 국립극장장을 지낸 최진용(67)의정부예술의전당 사장이다.


# 방송국 PD가 되고 싶어 문공부 첫발

최 사장은 광복 직후 인천에서 태어났다. 6살 때까지 화수동 성냥공장 옆에 살다가 김포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다시 돌아와 동산중·고교를 졸업했다.

   
 
최 사장은 인천을 싫어 했다. 학창시절 동아리 활동을 통해 문화에 대한 갈증이 타올랐지만 인천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은커녕 제대로 된 공원조차 없는 문화불모지였다.

그는 KBS에서 PD로 일해 볼 요량으로 문화공보부 문을 두드렸다. 근무가 끝나면 보직 변경을 기대하며 방송국으로 달려가 PD수업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화재 업무를 맡았는데 생각지 못한 재미를 느껴 미술사를 공부했고, 실존 작가의 세계를 접하고픈 마음에 자청해서 현대예술 업무로 옮겼던 것이 줄곧 문화 외길을 걸은 계기가 됐다.

이후 영화진흥과장, 전통예술과장, 국립현대미술관 전시과장, 국립중앙극장장, 대한민국예술원 사무국장 등으로 30년 넘게 문화계 현장을 누볐다.


# 영화·축제 현장 평생 지킴이

최 사장은 실무 경험이 풍부하다. 총무직이 아닌 영화·연극·미술·국악·축제 등 문화 분야에만 몸담았던 사례는 조직에서도 드물었다. 문화부 영화진흥과장으로 근무하던 1993년에는 국내 최초 영화정책서를 펴내기도 했고, 문화행사차 해외에 다녀온 것만도 100여 회에 달한다.

2003년 이사관 퇴직 뒤에는 유네스코세계민속축전기구협의(CIOFF) 한국위원회 부대표 등 굵직한 직책을 두루 역임했다.

오랜 세월 축적된 최 사장의 자산은 화법에서 드러난다. 느리고 어눌한 듯해도 가만히 듣고 있으면 어느새 자신의 해박한 문화지식을 상대방의 머릿속에 논리정연하게 풀어놓는다.

일례로 대화 도중 통영 얘기가 나오자 그는 지역 출신 박경리의 소설과 김춘수·유치환의 시, 윤이상의 음악과 전혁림의 미술을 연이어 화제에 올렸고 비슷한 풍경의 해외 항구도시에 대한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 소득 30% 이상 10여 곳에 기부

최 사장은 다양한 문화운동을 소리 없이 실천하고 있다. 민간기금으로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내셔널트러스트’ 등 10여 개 단체에 기부를 한다. ‘소득의 30% 이상을 도네이션하겠다’는 평소 신념 때문인데 실제로는 훨씬 넘긴다는 것이 지인들의 귀띔이다.

최 사장의 자택 서재에는 4만여 권의 양서가 보관돼 있다. 하루에 몇 쪽까지 읽었는지 수첩에 꼼꼼히 기록할 정도로 독서가 몸에 밴 그는 1981년 대한출판문화협회의 ‘대한민국에서 책이 가장 많은 사람’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하루에 다섯 권씩 20년을 구해도 보유할 수 없는 이 방대한 도서마저 후대에 물려줄 계획이다.

최 사장의 문화여정 최종 목적지는 우리 현실에 맞는 예술서 집필이다. ‘경험’이라는 것은 타인과 나눌 때에라야 가치가 있다는 지론에서다.


# 고상한 전유물 벗어나 즐길 수 있어야

최 사장은 의정부예술의전당을 이끄는 동안에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 평범한 시민의 삶 속에 가까이 존재하며 언제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문화모델을 완성하는 것이다.

문화는 예술가들의 고상한 전유물이 아니기에 시민들이 먹고 놀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공연장마다 좋은 식당이 있어야 한다며 독일의 작은 도시 바그너극장에 레스토랑이 5개인 사실을 언급했다.

마침 의정부예술의전당 레스토랑도 최근 재개장했다. 휴일 전당 앞에는 젊은이들이 음악을 틀어 놓고 자유롭게 춤추며 자전거 묘기를 부린다. 오는 5월 최 사장이 집행위원장으로 있는 의정부국제음악극축제에서는 경기북부 시민들만 출연하는 뮤지컬이 공연되고, 같은 시각 무대 밖에는 벼룩시장이 선다.

인터뷰 말미, 최 사장은 아일랜드 방문에 앞서 그 나라 문화를 이해하려 구입했다는 시드니 오코너 음반을 내밀어 보였다. 작은 문화에서 재미를 찾는 그의 일상이 눈에 선했고, 독특한 시민참여문화가 의정부에서 꽃피워 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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