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따뜻한 봄날의 어느 오후, 한 주부가 낮잠을 자고 있다. 그녀는 꿈속에서 염라대왕을 만났다.

염라대왕이 누구인가, 죽은 이의 영혼을 다스리고 생전의 행동을 심판해 상벌을 주는 지옥의 왕이 아니던가! 염라대왕은 여인의 상벌을 주기에 앞서 그녀가 누구인지 물었다. “너는 누구냐?” 여인은 자신이 철수 엄마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같은 질문은 다시 반복됐다. “네가 누구의 엄마인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잠시 생각한 뒤 여인은 자신을 김만수라는 사람의 아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염라대왕은 “네가 누구의 아내인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좀 더 신중히 생각하던 여인은 자신의 이름은 이영희이며 55세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같은 질문은 반복됐다.

“네 나이와 이름을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결국 여인은 괴롭게 소리쳤다. “내가 누구인지 누가 좀 알려 주세요!”

오늘은 자아에 대해 묻고 있는 우화로 시작해 봤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에 반해 자신의 사회적 위치나 이름을 말하기는 쉽다. 누군가의 딸, 아내, 어머니, 며느리, 직장 내의 위치 등으로 말이다. 이렇듯 자신의 위치를 보장받기 위해선 반드시 타인을 필요로 한다.

 내가 딸이자, 아내이자, 어머니이고 며느리일 수 있는 이유는 부모와 남편, 자식들과 시부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름으로 규정된 자신은 진정한 자기 주체가 아니다. 타인과 구별되는 그저 하나의 이름일 뿐이다. 오늘 소개할 영화 ‘하인’은 바로 이런 주체와 사회적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계급적 시각에서 다룬 작품이다.

토니는 새로 살 집에 하인 배럿을 고용한다. 배럿은 차분하고 침착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빈틈 없이 해 나간다. 이에 토니는 배럿에게 무척이나 만족해한다.

그러나 토니의 애인 수잔은 배럿이 못마땅하다. 그녀는 토니의 집에서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숨 막히는 느낌을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집의 소유자는 토니이지만 집 안 관리와 인테리어까지도 배럿의 질서 아래 정돈돼 있었다.

그리고 토니는 자신의 방과 서재 등 제한된 공간에서만 생활하는 반면 하인인 배럿은 온 집안 구석구석을 관리하고 활용한다. 하인 배럿에 대한 토니의 신뢰와 의존이 깊어질수록 이 두 사람의 계급적 관계는 역전돼 간다.

단순하게 바라보자면 하인은 주인에게 종속된 삶을 살아가는 자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삶의 방식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주인이 하인에게 종속돼 있음을 알게 된다.

주인은 하인 없이는 밥을 차려 먹거나 세탁을 하고, 집안을 치우는 등의 단순한 일조차도 하지 못한다. 주인의 모든 일상은 하인의 도움과 노동으로 가능해진다. 배럿과 토니의 계급적 딱지인 주인과 하인이라는 이름은 영화의 후반부로 가면서 서서히 지워진다.

그들의 관계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간(배럿)에게 끝없이 의지하는 능력 없고 태만한 사람(토니)과의 관계일 뿐이다. 급기야 스스로 걸을 능력마저 상실한 주인 토니는 하인 없이 살아갈 수 없는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고 하인 배럿은 토니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는 진정한 주인이 돼 영화는 끝을 맺는다.

감독 조셉 로지의 진보적인 정치관을 반영한 1963년도 작품인 영화 ‘하인’은 인간의 심리와 현실의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층위를 세련된 연출력으로 완성한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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