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경호 영림목재 대표이사

고교 1학년 여름 방학 직전 어느 토요일의 추억을 떠올려본다. 방과 후 친구 몇 명과 부평 너머 계양산에 가서 칡을 캐 먹자는 데 합의했다.

그렇다고 전에 칡을 캐본 경험이 있는 친구도 없었고 등산복은 꿈꿀 수도 없는 시절이었으며 호미같은 도구가 준비될 리가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버스를 타고 산으로 향했다.

물어 물어 산 입구에 도착해보니 그렇게 정상이 높아 보이지도 않아 우리는 용감하게, 아니 무모하게 산길을 타기 시작했다. 한참 올라가니 목이 마르기 시작하는데 지금처럼 페트병에 물을 담는 방법도 없었고 도중에 샘물이 있을 턱이 없는 상황이어서 오도가도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정상에 올라가 일단 칡을 캐 먹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고 서로 격려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정상에 막상 도착해보니 칡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아예 없었던 것이다.

 다른 길을 택해 하산하다 보면 칡이 있겠지 하는 막연한 결론을 내곤 쉬지도 못하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도중에 한 친구가 칡넝쿨을 찾아내 환호를 질렀으나 도구도 없이 길에서 주운 작대기로 쉽게 캐질 리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매우 가파른 곳에 있었고 깊게 박혀 있을 뿐만 아니라 10월이 돼서야 제대로 익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천신만고 끝에 뿌리 일부분을 뽑아내 흙도 제대로 털지 못하고 입에 통째로 급히 넣어 우물거리며 어둠이 내리는 산길을 돌아 내려왔다.

입안과 입술은 온통 흙 묻은 칡껍질과 즙이 묻어 새까맣게 되었지만 독특한 냄새와 뱃속의 풍만감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칡은 장미목 콩과 덩굴식물이다. 한글 어원은 알 수 없으나 「두시언해(杜詩諺解)」에 따르면 ‘츩’에서 ‘칡’으로 변했으며, 덩굴줄기의 속껍질은 한방에서 갈근(葛根)이라 해 약재로 치열·산열제·발한·두통 등에 쓰인다고 한다.

 강원도 영월에는 ‘칡 줄 다리기’라는 축제가 있는데 이 축제는 단종이 어린 나이에 쫓겨나 이곳에서 비운의 귀양살이를 하게되자 백성들이 그의 복위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사이지만 조선 태종 이방원이 고려의 명신(名臣) 정몽주의 마음을 알고 싶고 또 도움을 청하는 「하여가(何如歌)」 속에 칡을 넣은 것은 실수가 아닌가 하고 개인적으로 생각해본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에 대해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로 “(前略)…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 있으랴”로 답했는데, 아무래도 칡의 부정적인 의미가 그의 불충실한 변심을 요구하는 뜻으로 해석돼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없다고 했지만 예컨대 엉키는 칡 대신 푸른 소나무나 곧은 대나무, 향기로운 국화를 의인화해 나라의 미래를 위해 함께 가자는 은근한 권유가(勸誘歌)류였다면 어떠 했을까.

즉, ‘휘영청 휘며 뻗은 낙락장송’ 또는 ‘강물은 돌고 돌아 바다에 이른다’하며 충성의 융통성을 강조한다던가, 지조를 지켜준다는 의미로 ‘대나무는 매듭을 지며 잘도 커가네’ 혹은 두 임금을 모실 수도 있다는 의미로 ‘국화 꽃은 한 벌만을 맞이하지 아니 하네’라고 했다면 정몽주의 대답이 다소나마 긍정적으로 변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

사실 칡넝쿨은 고혹적인 모습도 아닌 데다 왠지 더부살이의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덩굴식물이 주는 뜻은 줄기가 벋어나가는데 다른 물체에 감기거나 또는 덩굴손 따위로 다른 물체에 붙어 올라가고 옆의 식물에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부정적인 것 또한 사실이다.

다른 생명체의 삶을 보더라도 뻐꾸기처럼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 새끼를 기르는 경우가 있어 비난받기도 하고 인간사에도 더부살이 설움에 그다지 관용적이지 못하지 않은가.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칡의 생존방식도 본성이요, 본능일 것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질과 천성을 어찌할 것인가 말이다.

자고이래(自古以來)로 인간이 신체적 어려움을 겪을 때 목숨을 구해주는 식물을 구황식물(救荒植物)이라 하는 바, 칡도 그중 하나인 것이다. 금년 여름엔 이 칡즙이라도 자주 마시며 이 무더위 속의 갈증과 하릴없이 반복되는 숙취(宿醉)나 달래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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